정부가 손놓은 진상규명, 시민사회 몫으로… 아이들 작문까지 살피며 흔적 좇아[간토대학살 100년]
간토대학살의 진상규명 작업은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양국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특히 일본에선 간토대지진 당시 쓰여진 아이들의 작문까지 뒤져가며 과거의 잘못을 확인하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 단체들은 간토대학살 100주년을 앞두고 서로 연대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한국에선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시민모임 독립 등 40여개 시민단체가 지난 7월 발족한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가 주축이 됐다. 위원회 측은 국내에서 관련 학술행사와 전시회 등을 진행했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힘을 싣고 있다.
일본에선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등 전문가 192명과 시민단체 130여곳이 ‘간토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희생자추모식 실행위원회’를 발족해 활동해왔다. 이들은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에 학살 사과와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오는 2일에는 일본 국회 앞에서 촛불집회를 하며 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낭독할 예정이다.
간토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개인차원의 노력도 이어져 왔다. 민간에 흩어진 자료를 취합해 진상을 규명하려는 재야사학자들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그들이다. 지난 40여년간 학살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제작해온 재일동포 2세 오충공 감독(68)이 대표적이다.
중학교 교사 출신으로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연구해온 고토 슈(74)는 어린아이들의 작문에서 학살의 증거를 발견해 주목받은 바 있다. 대지진이 발생한 1923년 당시 요코하마의 초등학교들은 작문으로 지진을 기록하려 시도한 바 있는데, 남아있는 이들 사료를 분석해 학살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올해 처음 언론에 공개된 원본에는 ‘조선인들이 달아나 모두가 쇠몽둥이를 들고 조선정벌(학살)을 하러 갔다’, ‘(어른들이) 죽은 조선인을 감옥 앞 바다에 버려버렸다’는 등 생생한 목격담이 쓰여있었다.
고토는 최근 일본 TBS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의 작문은 구체적이고 아주 세세하게 그 양상을 기록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했지만, 여러 아이들은 학살을 목격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진도 7.8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5분여 동안 비슷한 규모의 여진이 두 차례 더 일어났고, 간토지방은 대혼란에 빠졌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던 많은 가정집과 음식점 등에서 화재가 발생해 도심 목조가옥 밀집지역을 모두 태웠다. 요코하마는 도시 전체가 괴멸했다. 사망 9만9331명, 행방불명 4만3476명, 이재민 340만명, 가옥 전소 44만7128채, 전파 12만8266채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14억7000만엔)의 4배가량인 55억~65억엔으로 추정됐다.
지진 직후 출범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지진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재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본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 폭탄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됐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정부가 공작대를 조직해 이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다는 의혹도 있다.
일본 전역에서 3700여개의 일본인 자경단이 조직돼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로 무장한 자경단은 검문검색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어려운 일본 발음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죽이기도 했는데, 중국인은 물론, 도호쿠, 홋카이도 등 다른 지역 출신 일본인들도 함께 피해를 입었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로 피신했지만 자경단은 경찰서까지 쳐들어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이를 모른 척했다. 오히려 야쿠자가 자신들의 조직원인 조선인을 보호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학살된 조선인은 일본의 보수적인 통계에 의해서도 2500명이 넘는데, 실제로는 6000~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자경단 일부를 연행해 조사했으나 극히 소수만 기소했으며, 이들도 대부분 증거 불충분 등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20년대 초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로 노동운동, 농민운동, 사회주의운동이 강하게 대두됐다. 또 조선과 대만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면서 우익과 군부가 긴장하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간토대지진은 일본 우익과 군부가 그동안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회주의 세력과 조선인들을 제거하고 일본의 민심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간토대학살의 와중에 일본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6살짜리 조카, 사회주의자인 아내 등이 군경에 의해 구타당해 죽는 등 많은 일본 사회주의자들도 학살됐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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