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없어지는 기분”···‘장애인 체육의 요람’ 정립회관에 무슨 일이
“여기가 1975년에 개관을 했는데 제가 10대 시절 개관식에 참석도 했거든요. 옛날에는 운동장도 있어서 목발 짚고 축구도 하고 그랬는데 많이 바뀌었죠.” 서울 광진구에 있는 장애인 복지·체육시설 ‘정립회관’은 소아마비 장애인인 김덕윤씨(63)와 ‘50년’을 함께한 곳이다. 개관 당시 정립회관은 서울의 장애를 가진 중·고등학생들이 셔틀버스를 타고 와 학교에서 못했던 체육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
학창 시절 정립회관에서 “사격도 하고 수영도 하고 활도 쏘는” 운동을 맛본 김씨는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며 바빠진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운동하기 위해 정립회관을 찾았다. 휠체어농구와 배드민턴, 휠체어테니스, 아이슬레지하키 등 평생 다양한 운동을 해왔고 퇴직 후인 2016년부터는 탁구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김씨는 운동을 위해 그즈음 경기 용인에서 광진구로 이사도 왔다. 현재 장애인탁구 서울시 대표 선수인 김씨에게 정립회관은 여전히 ‘유일무이한’ 훈련 장소다.
다른 산하 시설 빚 떠안아 ‘개점휴업’ 상태···이용자들 “우리도 운동이 하고 싶습니다”
국내 최초 장애인 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김씨처럼 수많은 장애인의 생활체육과 국가대표 훈련을 책임져왔다. 장애인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이 많은 데다 장애 친화적인 운동시설이 종합적으로 갖춰져 있어 ‘장애인 스포츠의 요람’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정립회관이 큰 위기를 맞았다. 상위기관인 한국소아마비협회의 또 다른 산하 시설인 ‘정립전자’가 마스크 사업에 실패하면서 진 40억 상당의 부채를 정립회관이 일부 떠안게 됐다. 지금까지 압류·추심된 돈만 8억원이 넘는다. 서울시에서 나오는 보조금까지 압류되는 상황에서 정립회관은 외부 강사 급여 지급 등이 어려워 운영하던 체육·문화 프로그램을 대부분 중단했다. 지난달엔 직원들의 급여도 체불했다. 정립회관이 지하철역과 멀고 언덕위에 있어 많은 장애인이 이용하던 셔틀버스도 약 두 달 전부터 운영이 중단됐다.
김덕윤씨는 “내 고향 같은 곳을 없애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탁구장과 바둑실, 체육관 등은 정립회관 직원들이나 이용자들이 자체적으로 운영·관리를 하고 있지만, 이용자들은 이마저도 사정이 더 어려워져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 운동을 아예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직원들과 이용자들은 한 달 전부터 매일 오전 8시마다 정립회관에 있는 협회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30일 기자가 찾은 집회 현장엔 휠체어 장애인 20여명을 포함해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 이용자는 집회 도중 “우리도 운동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외쳤다.
‘불통’ 비대위···이용자들 집회는 ‘선동’에 의한 것?
장애인 이용자들은 대화와 소통에 전혀 나서지 않는 협회의 태도가 불안과 우려를 증폭시켰다고 했다. 협회 측은 지난해 12월 박근상 건국대 산업공학과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를 꾸리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시설을 운영하고 이용해온 직원들과 당사자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협회가 수익사업에 나서기 위해 “돈이 안 되는” 일부 시설을 정리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덕윤씨는 “아예 시설을 없애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유료화를 하려는 건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기존에 이용해 온 것들에 어떤 변화가 생길 테니까 이용자로서는 대화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서로 얘기해보자는 취지인데 그에 대해 전혀 답변이 없으니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협회 측은 이러한 이용자들의 요구가 ‘선동’에 의한 것이라며 되레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협회는 지난 28일 낸 보도설명자료에서 “정립회관과 서울IL센터를 중심으로 한 산하시설 직원들은 문제의 책임이 마치 현재의 법인 이사회와 비대위에 있는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는 한편, 장애인들에게 날조와 허위로 왜곡된 사실을 전달해 동참하도록 선동하고 90세가 넘은 휠체어를 탄 정립장애인주간보호시설 이용인까지 무더위에 동원했다”고 했다.
“‘제2의 집’ 지키기 위해 나섰다”···‘장애인 체육의 요람’ 50년 역사는 지켜질 수 있을까
협회가 ‘90세가 넘은 이용인’이라고 지목한 김설자씨(90)는 지난 30일 기자와 만나 “나이 먹었다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누가 이 나이에 오라 한다고 나가겠냐”며 “(보도설명자료를 보고) 기분이 나빴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정립회관에 와 수영을 하고 국악·장구·미술 수업과 체조를 한다는 김설자씨는 이곳을 “제2의 집” “일상의 터전”이라고 표현했다. 정립회관 ‘20년차’라는 그는 “여기만 쭉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직원·강사들)하고도 오래 본 사이”라며 “땡볕에서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나도 다 (상황을) 보고 듣고 하는데 같이 나서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협회는 보도설명자료에서 “현 법인 이사회와 비대위는 추가적인 압류 추심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폐업으로 시설이 비어있는 ‘정립전자’ 건물의 임대를 통해 채무를 상환하고, 정립회관의 체육관과 수영장을 ‘전문 장애인 체육시설’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인 임대 계획과 시설 운영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 이용자들은 “대화를 하려면 우리하고 직접 대화를 해야지 왜 보도자료를 먼저 내냐”며 협회의 태도에 불만을 표현했다.
김덕윤씨는 정립회관이 앞으로도 ‘장애인 체육의 요람’으로 남길 바란다고 했다. “비장애인은 일상에서 걸어 다니면서도 운동이 어느 정도 되지만 장애인은 그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장애가 있을수록 운동을 더 신경 써서 해야 해요. 특히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으면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가 힘든데 이것저것 해보다가 적성에 맞는 운동을 찾아야 하거든요. 근데 장애인은 이렇게 종합적으로 다 경험해보고 자기한테 맞는 운동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정립회관의 의미가 큰 거고 꼭 지켜져야죠.”
민서영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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