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등에 올라탄 코끼리…성숙한 어른 없으면 이렇게 된다

한겨레 2023. 8. 3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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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늙음의 과학
‘당구공 재료’ 상아 착취한 인간의 탐욕
어른 줄어들자 발정만 남은 어린 수컷들
코끼리는 보통 나이 든 암컷 코끼리를 주축으로 하는 모계 씨족사회를 이뤄 살아간다. 코끼리 무리의 리더는 가장 나이 많고 현명한 암컷 가모장이다. 한겨레 자료

한때 인터넷에 돌던 엽기 사진이 있습니다. 코뿔소 등에 올라타 짝짓기를 시도하는 젊은 수컷 코끼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다 자라면 3t에 이르는 거구를 자랑하는 코뿔소인지라 어디서 체급으로 밀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육중한 코뿔소라 할지라도 최대 6t까지 자라는 아프리카코끼리 수컷에 비하면 가냘픈(!)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수코끼리의 느닷없는 행동은 코뿔소에게는 황당한 해프닝이 아니라 끔찍한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코끼리의 거대한 덩치에 짓눌린 코뿔소는 자칫 뼈가 부러지거나 내장이 파열돼 심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사이, 아프리카의 국립공원에서는 이런 사고가 자주 목격됐고, 가뜩이나 개체수가 줄어 멸종 직전에 몰린 코뿔소를 보호해야 하는 당면 과제와 이런 코끼리의 난폭성이 자칫 다른 동물이나 사람에게 향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이들의 돌발행동을 주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일탈행동 뒤에는 뜻밖의 사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 코끼리에게 늙음이란 쇠약이 아니다

코끼리는 보통 나이 든 암컷 코끼리를 주축으로 하는 모계 씨족사회를 이뤄 살아갑니다. 코끼리 무리의 리더는 가장 나이 많고 현명한 암컷이며, 그가 굳건하게 버티는 한 어린 코끼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가모장은 한눈판 어린 코끼리가 사자의 시야에 노출됐을 때 가장 먼저 뛰어가 그를 구하고, 가뭄이 오래 지속되면 무리가 갈증으로 쓰러지지 않게 오랜 기억을 더듬어 샘이 솟는 곳으로 안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코끼리 집단에서 가모장 코끼리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합니다. 가모장 코끼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코끼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입니다.

리더를 잃은 코끼리들은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이 과정에서 어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어린 코끼리들의 생존율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집니다.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 코끼리의 존재는 어린 코끼리의 생존에 절대적인 셈이죠.

각 무리에 존재하는 가모장 코끼리는 모두가 무리를 위해 헌신하고 애쓰지만, 모든 가모장의 능력치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때 각각의 가모장 능력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는 이들의 나이입니다.

비교적 젊은 가모장이 이끄는 코끼리 무리와 노장이 이끄는 코끼리 무리의 생존력을 비교해보면, 후자의 경우가 항상 더 우수합니다. 사람처럼 문자화된 교육을 받을 수 없기에, 코끼리에게 현명함의 바탕은 풍부한 경험이고, 이 다양한 경험치는 세월의 길이에 따라 더욱 두터워지기 마련이니까요.

코끼리의 평균수명은 70살 정도인데, 이보다 수명이 긴 사람도 은퇴하는 60대에 활발하게 리더로 활동하는 코끼리가 많다는 것은 이들의 능력치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암컷 코끼리에게 나이가 많다는 건 늙고 병들고 쇠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걸맞게 현명하고 강단 있어졌다는 뜻으로 읽히는 셈입니다.

■ 어른 코끼리는 생존 안내자이자 규범 가르치는 선생

어린 코끼리들은 유년 시절에 누구나 할머니를 중심으로 뭉친 엄마, 이모들과 누나들의 보살핌을 살뜰히 받으며 자라납니다. 다 자라서도 여전히 자신의 씨족 무리에 남는 딸과 달리 아들은 유년기가 끝나는 10살 남짓이 되면 자신이 태어난 무리를 떠나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단독 생활을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원에는 이미 이런 이유로 각자의 무리를 떠난 수컷 코끼리들이 있기에 이들끼리 다시 무리를 짓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년 코끼리들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코끼리의 무리를 찾아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일이 많습니다. 비록 아직 성체는 아니지만, 유년기를 지난 코끼리는 이미 자연에서 대적할 자가 거의 없을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니 생존을 위해서라면 굳이 어른 수컷을 따라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들을 찾아 그 무리에 합류할까요?

코뿔소에게 일탈행동을 하던 코끼리들의 경우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발정기에 들어선 혈기 왕성한 수컷이었고, 고향 마을을 떠난 뒤 나이 든 수컷들과 합류한 적 없이 자란 천방지축 코끼리였습니다. 여기서 어른 수컷 코끼리의 역할이 비로소 밝혀집니다. 나이 든 코끼리는 소년 코끼리의 생존 안내자인 동시에 규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앞선 칼럼에서 ‘와일드후드’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어린 개체가 성숙한 어른 개체로 제대로 성장하려면 자기 안전을 돌보고 사회적 지위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며, 자립할 수 있음과 동시에 성적 욕구를 적절하게 통제하고 타협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른 수컷 코끼리는 바로 이런 것을 어린 수컷 코끼리에게 가르칩니다. 이들이 삼촌이자 아버지이자 할아버지가 되어 어린 코끼리가 바람직한 어른 수컷으로 자라는 것을 돕습니다.

코끼리가 지금 같은 생존 전략을 이어온 이래 이 순환 고리는 아주 잘 작동했습니다. 유년기를 벗어난 소년 코끼리는 어른을 만나 지킬 것은 지킬 줄 아는 청년이 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이들은 잠시 암컷 코끼리에게 돌아가 사랑을 나누고 다음 세대를 번식시킨 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다음 세대의 어린 수컷을 가르치는 선순환 구조였죠.

하지만 여기에 인간이, 특히나 욕심 많은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이어왔을지 모를 코끼리 사회의 시스템이 무너져버립니다.

■ 비극이란 성숙한 태도 배우지 못한 채 몸만 자란 상태 

나이 든 수컷 코끼리는 욕심쟁이 인간들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멋들어지게 자라는 코끼리의 엄니, 즉 상아(象牙) 때문입니다. ‘흰색 금’이라 부르는 상아는 단단하면서도 가공하기 쉽다는 특성이 있어, 근대 이전에는 수많은 공예품과 장식품의 재료로 비싸게 팔렸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플라스틱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했던 것도, 당구공 재료가 상아였기 때문입니다.

당구가 실내 스포츠로 인기를 끌자 당구공 수요가 늘었고, 도저히 상아만으로는 그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자 상금을 내걸고 상아를 대신할 만큼 단단하고 탄성이 좋으며, 가공하기 쉽고 매끄러운 물질을 찾는 과정에서 플라스틱이 만들어졌거든요.

하지만 상아를 대체할 플라스틱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게 된 지금도 상아의 수요는 만만치 않습니다. 여전히 상아에는 플라스틱에 없는 우아함과 고귀함이 있다고 여겨지니까요.

당구공은 원래 코끼리의 엄니, 즉 상아(象牙)로 만들었다. 당구가 실내 스포츠로 인기를 끌자 당구공 수요가 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밀렵꾼들은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 사냥에 적극적으로 뛰어듭니다. 이들의 눈에 코끼리는 귀한 상아의 공급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상아가 큰 개체부터 눈독을 들였지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상아가 큰 녀석을 잡아야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수컷의 상아는 암컷보다 크고 상아는 코끼리의 나이에 비례해 자라므로, 나이 든 수컷 코끼리부터 빠르게 수가 줄었습니다. 나중에는 무리를 갓 떠난 소년 코끼리를 지도해줄 어른 수컷이 거의 사라지게 됐습니다.

일탈행동을 일삼는 코끼리가 늘어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어른 수컷이 사라지면서, 성숙한 삶의 태도를 배우지 못한 채 몸만 자라난 코끼리들이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 발정기에 들어선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제약 없는 방종은 무모하고, 규칙 없는 일탈은 무정합니다. 이 젊은 코끼리들은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발정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호르몬이 그들을 날뛰게 하는지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그들은 그저 눈앞의 대상에게 달려들었죠.

하지만 코끼리가 코뿔소와 짝짓기한다고 자손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암컷 코끼리 혼자 임신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들의 일탈은 코끼리와 코뿔소 집단 모두를 위협하는 파괴적 행동이 되고야 말았죠. 현명한 어른의 부재가 남긴 상흔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 코끼리처럼 제대로 나이 들 수 있을까

지난 한 해 동안 노화와 나이듦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엮으면서, 어떻게 나이 드는 것이 가장 ‘제대로' 나이 드는 일인지 고민했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정답은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습니다.

어른은 아이를 돌보고, 아이는 어른에게서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배우며, 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어 자기 아이에게 배운 대로 물려주는 선순환의 고리를 이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인간은 모방의 동물이고 아이는 결국 어른을 따라, 혹은 부정하며 자라나는 존재이니까요.

점점 늘어날 것만 같던 초원의 폭도 추가 유입을 막은 것이, 이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외부에서 급히 투입한 나이 든 코끼리들의 존재였다는 점도 이 생각에 힘을 실어줍니다.

늙는다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지만, 나이 들며 조금씩 더 현명해진다면 그것은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테가 쌓이며 점점 몸피가 자라는 나무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늙음의 과학’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원고 보내주신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와 애독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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