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지켜주고, 비켜주는 가족의 탄생…‘남남’의 전혜진, 최수영[플랫]
ENA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남남>은 전형성을 벗어난 가족 서사를 보여줬다. 엄마를 ‘모성애 가득한 여성’을 넘어, ‘성적 욕망을 지닌 여성’으로 그렸다. 피가 섞였다고 무조건 가족이 아니라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주고 지켜줄 때 가족이라고 말했다. 1회 시청률 1.2%에서 시작한 <남남>은 최종회 12회엔 5.5%까지 올랐다. 이는 지난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 ENA 최고 시청률이었다. <남남>에서 고등학생 때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른 ‘솔직당당 싱글맘’ 김은미를 연기한 배우 전혜진, ‘쿨’한 엄마의 보호자이자 친구로서 일찍 철든 딸 김진희를 연기한 배우 최수영을 각각 만났다.
자위 장면 들킨 엄마 “치킨 시킬까?”···‘남남’의 전혜진 “엄마도 여자”
“엄마도 ‘여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좋았어요. 어떻게 표현할지 수위가 고민스러웠는데 ‘은미’라면 (자위 장면을 딸에게 들키고도) 당황하지 않고 ‘너 늦는다며’ ‘밥은?’ ‘치킨 시킬까’라고 말할 것 같았어요.”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전혜진은 ENA 드라마 <남남>의 엄마 ‘은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혼자 자위하다가 들킨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치킨을 주문할 생각에 신나한다. 오히려 딸이 충격을 받는다. <남남>이 시작부터 시청자들의 주목을 끈 장면이었다. 은미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자라다 고등학생 때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른 미혼모다. 사회적 시선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몫의 밥벌이를 해내면서도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극중 첫사랑, 그러니까 딸의 ‘아빠’와 재회했을 때도 그녀는 ‘남편’이나 ‘아이 아빠’를 원하기보다 오로지 자신을 사랑해줄 애인을 원한다.
전혜진은 “낯선 캐릭터를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만 있을 수 없고, 또 어떻게 하면 시트콤이 될 것 같았는데 감정선과 여러 표현들이 잘 조화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엄마’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한 인물을 이야기해서 좋았다”며 “학대받고 가족 없이 자란 은미에겐 핏덩이 진희가 있었기 때문에 강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고 했다.
<남남>은 전형적 가족 서사에서 벗어난 드라마였다. 부모 자식 간에 적당한 거리를 말한다.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손녀의 유전자 검사까지 한 상황. 딸이 상처받았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은미는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딸을 다그친다. 딸은 “왜 내가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대꾸한다. 피로 섞인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아버지한테 맞고 있는 은미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손을 내민 고교 동창 미정(김혜은)과 그의 엄마야말로 진정한 가족이었다. 드라마 최종회에서 미정의 어머니는 은미와 진희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까지 남긴다. 장례식장에서 상주 역할을 한 은미는 말한다. “내 엄마였어. 내가 정한. 누가 뭐래도 내 엄마.”
전혜진은 “부모가 ‘너만은 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러다보면 서로가 힘들어질 경우가 많다. ‘남남’이라는 제목처럼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걸 인정하면 좋겠다. 저도 아이하고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분리하자’ ‘다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모녀 사이가 주된 이야기인 만큼 모녀 두 배우의 ‘케미’가 중요했다. 전혜진이 최수영보다 먼저 캐스팅됐다. “딸이 누가 될지 무척 궁금해했는데 수영이어서 천만다행이었어요. 중간에 아는 동생을 통해 ‘괜찮은 친구’라고 들었고 수영씨가 먼저 호감을 표현해왔죠.” 엄마와 딸의 대화가 많다보니 소파에 앉아서 찍은 장면이 많았다. 둘은 TV를 향해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시종일관 티격태격했다. 전혜진은 “소파에서 대사를 하고 덧붙여서 농을 치는데, 이게 대사인지 아닌지, 컷이 됐는데도 둘이 그러고 놀기도 했다”며 “부지런해서 정말 예뻐보였다. 이번에 좋은 친구를 만났다”며 웃었다.
그동안 전혜진은 주로 카리스마 있는 이지적인 인물들을 연기했다. 경찰만 다섯 번 맡았다. <남남>처럼 다소 코믹한 연기와는 결이 달랐다. 그래서 전혜진은 ‘은미’를 처음 마주했을 때 “우선 경찰이 아닌 점이 반가웠다”고 했다. 그는 “틀을 깼다는 점에서 감독님·작가님에게 감사하다”며 “이왕 이렇게 된 거 코미디도 좋고, ‘각 잡은’ 인물이 아니라 더 풀어지는 인물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혜진은 오래전 연극 무대에 설 때부터, 아이를 낳고 영화를 찍으면서도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해왔다. 그는 영화 <불한당>으로 칸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도 “여배우들이 설 만한 캐릭터가 잘 없다. 시나리오에 목말라 있다”고 했다. 엄마의 욕망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은미를 만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요. 예전에는 남자 감독님이 글을 쓰고 연출할 때 ‘여자를 잘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저도 지금 제 아들을 보니까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여성 작가님들이 많으니까 완전히 바뀌고 다양한 캐릭터가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금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남남> 같은 드라마가 더 잘되고 반응이 나와야 이야기가 되겠죠.”
“실제로 엄마랑 ‘남남’될 생각했죠”···‘남남’의 최수영
“‘진희는 은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딸이자 가족이고 남편이고 애인’이라는 말, 제가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어요. 운명 같은 작품이고 경험을 녹여낼 수 있는 지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ENA 채널 드라마 <남남>에서 딸 ‘진희’를 ‘찰떡’같이 연기한 배우 최수영을 24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사람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났다.
극 중 진희는 ‘쿨’한 엄마 ‘은미’의 보호자인 듯 친구인 듯 때로는 원수인 듯 지내지만, 엄마가 가정폭력을 당한 기억으로 힘들어할 땐 조용히 엄마 옆을 지킨다.
최수영은 실제 모녀관계가 극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지난 작품을 끝내고 나서 소속사 대표에게 ‘엄마랑 하는 이야기’를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석 달 후 그 앞에 놓인 <남남> 대본. “너무 재미있었다”는 최수영은 “엄마 역할이 전혜진 선배님이어서 ‘어떻게 이런 작품이 나한테 왔지?’ 싶을만큼 행복하고 흥분됐다”고 기억했다. 그는 “엄마랑 역사가 길다. 정말 엄마랑 남남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딸이었다”며 “이렇게 살다가는 나도 어른이 안 될 것 같고, 엄마도 건강하지 않을 것 같은 모녀였다”고 했다. “드라마 방송 중에 어느 날, 엄마에게 문자가 왔어요. ‘내가 은미 같니?’라고요. 엄마가 많은 감정을 가르쳐준 건 맞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웃으시더라고요.”
극중 함께 여수 여행을 가서 짜증 부리는 엄마를 두고 진희는 혼자 케이블카를 타러 간다. 최수영은 이를 ‘경험’을 녹여 낼 수 있었던 장면으로 꼽으며 “밀라노 여행 가서 엄마가 갑자기 서운해하고 내일 비행기를 끊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드라마엔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각자의 길을 가는 장면이 많다. 그 길에서 감정이 부딪치며 싸우기도 하지만 은미와 진희는 서로 영역을 지켜주고 때론 비켜준다. 마지막회에서 진희는 혼자 1년간 세계일주를 계획한다. 여행을 간다고 선언하는 딸 앞에서 엄마는 자신의 캘린더를 꺼낸다. 딸이 혼자 가겠다는 말에 서운해하지만 “내가 진희를 놔야 진희도 나를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어른이고 엄마니까”라고 말한다.
“진희가 마지막에 이제는 혼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하는데 저는 그걸 빨리 깨우쳤어요. 누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해줬어요. ‘비행기에서 산소호흡기 내려올 때 나부터 쓰고 옆 사람 씌운다’고요. 6년 전 20대 중반쯤 ‘내가 엄마를 놔야 엄마도 나를 놓고 서로 성장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엄마랑 떨어져 지내기 시작해 지금은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알았어요.”
극중 일찍 철이 든 진희가 엄마에게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이 한번 있다. 첫사랑과 연애하고 싶어하는 엄마가 의견을 묻는데 진희는 “금붕어 똥이 되기 싫다”고 말한다. 어릴 적 동네 아줌마들이 금붕어는 예쁜데 스스로 똥을 못 끊어내서 저렇게 달고 다닌다며 진희를 금붕어 똥에 비유한 사건을 떠올린 것. 진희가 “내가 나라서 엄마한테 얼마나 미안해 하며 살았는데 그래서 밥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사람들이 금붕어 똥 소리 못하게”라고 소리치자 엄마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엄마에게 미안함을 지녔지만 말하지 못한 딸들이 한번쯤 느껴봤을 법한 감정이다.
최수영은 ‘진희’라는 캐릭터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억눌린 감정의 문을 여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금붕어 똥’ 장면은 제가 준비한 거 보다 훨씬 더 감독님이 감정이 나오길 바라셨다”면서 “지금 생각하면 잘한 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쉬움이 남는다. 원래 배우들은 차에 타면 항상 생각한다. 이렇게 할 걸”이라며 웃었다. 아이돌 ‘소녀시대’가 아닌 배우 최수영은 연기에 대한 고민이 깊다. ‘배우로서 매력이 뭘까’ ‘계속 보고 싶게 하는 매력이 뭘까’ ‘연기를 어떻게 맛깔나게 할 수 있을까’. 그가 계속해온 고민들이다. 그는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자연스럽다고 잘하는 건 아니니까. 제 앞까지 왔다가 불발된 작품을 보면 ‘내가 제작하는 사람이어도 저 배우를 썼겠다’ 하는 순간이 있었다. 나라는 배우의 경쟁력이 뭘까. 매력이 뭘까. 맛깔난 연기는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을 끝도 없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런 면에서 <남남>은 최수영에게 전환점이었다. “저는 자존감은 높지만 자신감은 높지 않은 사람이에요.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결과가 생겨도 제 자존감으로 빈자리를 메워왔는데 <남남>은 저에게 자신감을 채워주는 프로젝트였어요.”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소녀시대’는 어떤 의미일까. 이제는 깨고 나가야 하는 틀일까. “소녀시대를 깨고 나가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소녀시대는 피부 같은 존재에요. 배우 활동 하는데 소녀시대 생각이 안 나게끔 한다는 것은 제 능력과 경쟁력 문제일 뿐이에요. 최수영으로 작품을 하겠지만, 제가 소녀시대로 쭉 살아가는 것은 바뀔 수 없어요. 달라질 수 없는 명제 같은 것이죠.”
아직 못 해본 역할이 더 많다는 최수영. 그는 액션, 로맨틱 코미디, 의학·법정드라마, 스릴러 등등 하고 싶은 게 많다. 그는 “다양하게 많은 작품을 하고 싶다. 30대로서의 ‘로코’도 해보고 싶다. 현실적인 로맨스 드라마도 좋다”며 “단편도, 독립영화도 다양하게 많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임지선 기자 vision@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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