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도서관 10개 분량 유전체 정보와 치명적 병원균 샘플 가득...한국질병 연구 ‘최전선’ 가다
유전체 정보·병원체 보관…공공기관 중 보안등급 가장 높은 ‘가급’
통합바이오빅데이터·병원체은행으로 한국인 질환 해결
박현영 원장 “미래세대를 위한 유산 만들고 있어”
지난 29일 오전 10시 충북 오송의 국립보건연구원은 출입절차부터 까다로웠다. 출입증이 없으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연구소 곳곳에는 ‘사진 촬영 불가’라는 안내문도 자주 눈에 띄었다. 내부에서는 무선랜은 물론 개인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연결하는 ‘테더링’도 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관계자들은 정보 유출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군사시설도 아닌 국립보건연구원의 보안등급은 공공기관 중에 가장 높은 ‘가급’이다. 삼엄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은 자칫 생화학무기로 변신할 수 있는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 등 병원체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인의 유전자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있어 보유한 정보의 민감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외부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이곳에선 매일 국내 최고 수준의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인의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한국인의 유전자를 수집하고 분석해 희귀질환과 만성질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맞춤형 정밀의료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국가병원체자원은행에 병원체 935종을 보관하고 있는데 연구개발(R&D) 목적으로 필요한 곳에 분양하고 있다.
이날 만난 박현영 국립보건연구원장은 “이곳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다양한 세균을 보관하고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는 일은 결국 미래의 한국인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 원장은 의사 과학자 출신의 공직자로 지난달 24일 취임했다. 조선비즈는 이날 국립보건연구원을 방문해 질병 정복의 최전선을 취재했다.
◇유전자에 따른 다른 희귀·만성질환…바이오 빅데이터로 해결
국립보건연구원은 최근 통합 바이오빅데이터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바이오빅데이터는 한국인의 유전체 정보를 수집해 희귀질환자와 만성질환자에게서 발견되는 돌연변이를 찾아낼 수 있는 도구다. 박 원장이 국립보건연구원 미래의료연구부장 시절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시켰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된다.
박 원장은 유전체 분석으로 질병을 예방한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유명배우 안젤리나 졸리를 소개했다. 졸리는 2013년 유방암 절제 수술을 받았다. 유전자 검사 결과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높이는 ‘브라카(BRCA)1′이라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방암과 난소암이 발병하는 유전자를 미리 확인한 졸리는 2년 후에는 난소 절제술도 받아 결과적으로 유방암과 난소암을 모두 예방했다.
박 원장은 “질병이 발생하는 데에는 생활습관과 주변 환경,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유전자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면서도 “희귀질환의 경우 유전질환이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전자 분석 기술도 발전해 선별유전자 분석으로 17% 수준이었던 돌연변이 검출률은 전장유전체 염기서열분석으로 30%까지 올랐다”고 강조했다.
유전체는 인종별로, 개인별로 모두 다르다. 국립보건연구원은 최대한 많은 유전체 데이터를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이렇게 유전체 분석을 통해 나온 2차 자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희귀질환과 만성질환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알려주는 단초가 되고 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원(KIAST) 연구팀이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를 활용해 만든 희귀질환 환자 맞춤형 치료제 가이드라인은 올해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리기도 했다.
김정은 바이오빅데이터과 연구관은 “현재 국립보건연구원이 가지고 있는 유전체 정보는 23만8031건, 용량으로 치면 2.6PB(페타바이트·1PB는 100만GB) 정도”라며 “파편화된 정보보다는 어떻게 통합적으로 정제해서 고부가 가치가 있도록 활용할 수 있는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미 의회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는 장서가 240TB(테라바이트·1PB는 1000GB)이니 대략 미 의회도서관 10개 가량에 해당하는 정보량을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세균·바이러스 병원체도 자원…치료제·백신 개발 연계한다
국립보건연구원은 국가병원체자원은행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총 935종 7224주의 병원체가 보존되고 있다. 매년 찾아오는 독감과 생화학무기로 쓸 수 있는 탄저균, 코로나19까지 다양한 병원체를 이곳에서 보관한다. 병원체자원은행 건물은 총 3층으로 구성됐다. 건물 1층은 병원체자원을 보존하는 공간, 2층은 실험 공간, 마지막으로 3층은 사무 공간이다.
병원체를 보존하는 1층은 초저온 보존실과 액체질소 보존실로 나눠져 있다. 초저온 보존실에는 섭씨 영하 70~80도를 유지하는 냉동고가 줄을 지어 있었다. 한쪽에는 키오스크가 마련돼 있는데, 연구자들이 병원체를 반출입할 때 사용한다. 액체질소 보존실은 액체질소 온도가 올라가면 자동으로 액체질소가 충전되는 탱크들이 있는 곳이다. 액체질소 탱크는 섭씨 영하 195도를 유지해 병원체들을 오래 보관해야 할 수 있다. 초저온 보존실이 보관과 분양을 동시에 수행한다면, 액체질소 보존실은 오롯이 보관만을 목적으로 한다.
병원체자원은행은 치료제와 백신을 연구개발하는 연구진들에게 병원체를 분양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해 1294주의 병원체를 신규 수집하고 4925주를 연구기관 등에 분양할 만큼, 국내 치료제·백신 개발에 필수적인 곳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의 코로나19 백신의 임상을 함께한 공공백신개발지원센터와도 연계해 연구를 지원하기도 한다. 국립보건연구원은 대비가 필요한 질환의 치료제와 백신의 우선순위를 정해 연구개발을 진행할 계획이다.
국립보건연구원은 최근 중증발열혈소판감소증후군(SFTS) 항체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진드기를 매개로 감염되는 SFTS는 매년 200~300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하고 치사율이 10%에 달하는 질환이다.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일본 국립감염병연구소(NIID)와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국립보건연구원 산하 국립감염병연구소의 장희창 소장은 “국립보건연구원의 인프라로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를 늘려가고 있다”며 “흔히 ‘살인 진드기’라고 불리는 SFTS는 치료제와 백신이 없지만, 사망률은 높아 가장 우선순위로 잡고 항체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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