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없이 미래 없다” SK 최태원 집념의 ‘딥 체인지’
● 25년간 그룹 자산 10배 증가, 재계 순위 5→2위
● 최종현 선대회장,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 천신만고 끝에 1994년 이동통신사업권 획득
● 1979년 SKMS 도입… 사회와 공생하는 기업으로
● 최태원 회장, 탄소감축·사회 공헌에 진심
최태원 회장은 1998년 9월 1일 서른여덟의 나이로 SK㈜ 회장에 전격 취임했다. 부친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이 8월 26일 영면(永眠)에 들고, 외환위기로 대기업들이 연이어 문을 닫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의 취임 일성에는 "혁신적인 변화를 할 것이냐(Deep Change), 천천히 사라질 것이냐(Slow Death)"를 두고 기로에 선 젊은 경영인의 고민이 짙게 배어 있었다. 최태원 회장은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던 1990년대 말, 임직원에게 기업 생존을 위해 그룹 체질을 혁신적으로 바꿔나갈 것을 촉구했다.
취임 후 25년 동안 최 회장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그룹을 성장시키며 경영인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는 SK그룹 특유의 위기 극복 DNA와 패기, 도전과 혁신의 전통으로 '딥 체인지'를 끊임없이 추진함으로써 그룹 체질을 지속 가능 성장 및 미래 성장 사업구조로 완전히 탈바꿈한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최 회장 취임 당시에는 에너지·ICT(정보기술)를 주력 분야로 했으나, 이후 BBC(배터리, 바이오, 반도체) 등 그린·첨단 분야로 포트폴리오를 넓혀 더 큰 미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韓 '무자원 산유국' 만든 최종현 선대회장
올해는 최태원 회장이 취임 25주년인 동시에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이 운명을 달리한 지 25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업보국 정신으로 1962년부터 36년간 경영 일선에서 헌신한 최종현 선대회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SK그룹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고,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또 세계 최초 CDMA 상용화에 성공해 대한민국을 ICT 강국으로 향하게 하는 기반을 닦았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패기 넘치는 실행력을 바탕으로 현실화한 기업인이었다.
대한민국에 자본, 기술, 인재가 부족하던 1973년 당시 최종현 선대회장은 "선경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섬유 회사에 불과하던 선경이 원유 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하자 많은 이가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는 중동 지역 왕실과 석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등 치밀한 준비와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1983년부터 해외 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 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도 만류하는 사업이었다. 그는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한발 앞서 준비한 덕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사돈이기 때문이라는 특혜 시비가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내부적으로 좌절감이 팽배했지만 최종현 선대회장은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고 믿었다. 실제로 2년 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해 결국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주당 8만 원대였던 주식이 가파르게 올랐고, 결국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그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통신기술 개발에 집중하며 통신 강국의 기초를 닦았다. SK는 한국이동통신 경영권을 확보(1994. 7)한 지 1년 반 만에 세계 최초로 CDMA 디지털 이동전화를 상용화하며 세계 통신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CDMA는 세계 표준으로 확산되면서 '대한민국=CDMA 종주국' 위상을 갖게 했다.
인재양성·경영선진화 이끈 선각자
최종현 선대회장은 SK의 성장조차 불투명하던 1970년대부터 인재 양성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이자 자원 빈국 처지였지만 그에게는 "인재를 키우면 얼마든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그는 우선 1972년 조림 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했다. 2년 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일등 국가가 되기 위해선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야 한다"고 주창한 그의 의지가 반영된 재단이다. 재단은 유학생들에게 당시 서울 집 한 채 값보다 비싼 해외 유학 비용은 물론 생활비까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경영 분야에서 최초의 모델을 정립한 선각자로도 평가받는다. 그는 기업이 대형화·세계화하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주먹구구식 경영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SK의 경영 철학과 목표, 경영방법론을 통일되게 정의하고 업무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도록 1979년 SK경영관리시스템(SKMS·SK Management System)을 정립했다.
경영관리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던 시절 SKMS는 경영관리 요소와 일처리 방식 등에 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한 사례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정립한 SKMS는 경영환경 변화와 사회적 요구에 맞춰 2020년 2월까지 14차례 개정을 거쳤다. 현재 SK는 기업경영 목표에 이해관계자와 구성원 행복, 사회적 가치 추구 등을 반영하고 사회와 공생하는 기업으로 지배구조를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BBC·첨단산업 중심 글로벌 기업으로
최태원 회장은 25년 동안 SK그룹을 10배 규모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SK그룹 자산은 그가 취임한 1998년 32조8000억 원에서 올해 5월 기준 327조3000억 원으로 10배가량 증가했다. 재계 순위도 5위에서 2위로 3계단 뛰었다. 매출은 1998년 37조4000억 원에서 지난해 224조2000억 원으로 6배 이상, 영업이익은 2조 원에서 18조8000억 원으로 9배 이상 증가했다. 시가총액은 3조8000억 원에서 137조3000억 원으로 36배 이상 불어났다. 수출액은 8조3000억 원에서 83조4000억 원으로 10배가량 늘었다. 내수기업으로 평가받던 시절을 뒤로하고 한국 총수출의 10%를 떠맡는 글로벌 기업으로 환골탈태한 것이다.최태원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25년간 지속적으로 해외시장 개척, 수출 드라이브 강화 등을 통해 SK그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노력은 지난해 빛을 발했다. 2022년 7월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을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최 회장은 반도체·배터리·바이오(BBC) 분야 22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역사적 발표(historic announcement)"라며 "쌩큐, 쌩큐 토니(최 회장 영어 이름)"를 연발했다. SK그룹의 위상이 드러난 상징적 장면이었다.
SK그룹이 사업 포트폴리오 무게중심을 BBC·그린·첨단 산업으로 옮겨간 것은 2012년 2월 하이닉스 인수 때부터다. 최태원 회장은 에너지·화학 및 정보통신 등 2개 분야만으로는 지속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했고, 사내 반대에도 하이닉스 인수를 밀어붙여 관철했다. 하이닉스가 '글로벌'과 '기술'이라는 양 날개를 모두 갖췄다고 봤기 때문이다.
최태원 회장은 ESG경영 및 지속가능성장을 강조하며 탈(脫)탄소 그린 에너지·첨단 산업 추진에도 박차를 가해 왔다. ESG경영에서 앞서 나가야만 도태되지 않는다는 경영 철학에서다. SK는 △전기차 배터리 △바이오 △수소 △신재생에너지 △소형모듈원자로(SMR) △도시유전(폐플라스틱 열분해) △폐기물 및 수처리 등을 핵심 성장 동력으로 삼아 키워나가고 있다.
"사회에 공헌할 시간, 많지 않다"
SK그룹은 사회적가치(SV·Social Value)와 ESG경영을 가장 체계적이고도 선도적으로 추진해 온 국내 대표 기업이다. 최태원 회장이 SV·ESG를 비즈니스에 내재화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지속가능성장 추구 경영전략을 적극 추진한 데 따른 것이다. SK는 2016년 그룹 경영 철학이자 실천 방법론인 SKMS에 사회적가치 창출 조항을 명문화해 넣었다. 또 2018년부터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더블 보텀 라인(DBL)' 경영을 추진하면서 매년 사회적가치 창출액을 측정·발표해 왔다. 2022년 SK그룹이 창출한 사회적가치는 총 20조5000억 원으로 2018년 이후 연평균 5%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SK ESG 스토리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2020년 11월 SK㈜,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8개 관계사가 국내 기업 최초로 RE100에 가입했다. 2021년 6월 확대경영회의에서 최태원 회장은 그룹 차원의 넷제로를 선언했다. 그해 10월 CEO 세미나에서 그는 "2030년 기준 전 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의 1%에 해당하는 2억t의 탄소를 줄이는 데 SK가 기여하겠다"고 공언했다.
최태원 회장은 2021년 3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한 데 이어 지난해 5월 부산엑스포 유치 지원 민간위원장을 맡아 국가경제 및 사회발전을 위해 발 벗고 뛰고 있다. 최 회장은 "60대 나이에 접어들고 보니 이제 사회에 공헌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며 국가와 사회에 헌신할 뜻을 공공연히 밝혀오고 있다.
"특혜? 오히려 불이익"
사돈 특혜 의혹에 통신사업권 자진 반납
김영삼 정부 때 한국이동통신 인수해 1위 만들어
기자회견 1주일 전 SK는 제2이통사업자로 선정됐다. 체신부는 1992년 4월 정부 중심의 이동통신 시장에 민간사업자를 참여시켜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자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계획을 발표했다. SK(당시 선경)·포항제철·코오롱·동양·쌍용·동부 등 6개 그룹이 컨소시엄을 결성해 참여했고, 8월 SK가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SK는 1만 점 만점에 8388점을 얻어 2위 포항제철(7496점), 3위 코오롱(7099점)과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1980년 11월 대한석유공사 인수 이후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할 주력 사업으로 정보통신을 주목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는 정보통신을 성장 동력으로 삼고 시장을 확대하는 흐름이 있었다. 1984년 선경 미주 경영기획실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조직해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고, 미국에서 별도 법인을 설립해 통신사업을 벌였다. 1991년에는 선경텔레콤(1992년 대한텔레콤으로 변경)을 세웠다.
10여 년 축적의 시간 덕분에 SK는 제2이동통신 민간사업자로 선정됐지만 일주일 만에 정치권 정쟁으로 무산됐다. SK가 선정되자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과의 사돈 관계를 거론하며 SK의 사업권 획득에 반발했다. 게다가 경쟁에서 탈락한 기업들까지 특혜설 제기에 가담해 논란을 키웠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SK로서는 상당히 억울할 일이었으나 최종현 선대회장은 "국민 불신을 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차기 정권에서 실력으로 승부해 정당성을 인정받겠다"며 사업권을 반납했다.
1993년 2월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12월 제2이동통신 민간사업자를 선정하는 종전 방식과 한국이동통신(제1이동통신사업자)을 민영화하는 새로운 방식 등 두 가지 방안을 동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민간사업자는 전경련이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가 선정하면 기업 간 경쟁과 잡음이 치열해지니 자율적으로 정리하라는 취지였다.
공교롭게도 최종현 선대회장은 정부가 전경련에 결정을 요청했을 당시 이미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1993년 2월)된 상태였다.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할 때 SK를 민간사업자로 추천하면 공정성 시비가 재연될 수 있음을 고려, 그는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그는 곧바로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했다. 당시 SK는 한국통신의 자회사인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주식시장에서 공개 매입하는 쪽을 고려했는데, 이는 특혜 시비가 불거지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다만 SK가 민영화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이동통신 주가가 높아져 인수 비용이 늘어나는 단점이 있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특혜 시비를 차단하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주가는 8만 원대에서 30만 원대로 수직 상승했다. 경영진이 막대한 인수 자금 부담에 난색을 표하자 그는 "비싸게 사야 나중에 특혜 시비가 일지 않는다.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며 논란을 정리했다. 결국 SK는 1994년 1월, 시세보다 비싼 33만5000원에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인수했다. 인수 가격은 총 4271억여 원으로 당시 서울 목동 7단지 전체(2550가구)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1992년 1차 선정 당시 체신부에서 사업자선정 전담반장을 지낸 석호익 동북아공동체 ICT포럼 회장은 "법적·행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선정이었고, SK가 다른 기업에 비해 모든 조건에서 월등했다"고 말했다. SK의 이동통신사업권 획득 과정을 지켜본 한 재계 관계자는 "SK는 노태우 정권에서는 억울한 오해로 사업권을 반납했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사업자 선정 과정에 불참하는 등 오히려 불이익을 당했다. 그럼에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기술개발로 통신 강국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했다.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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