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노우!” 아버지 만류에도 꿈 이룬 아들…‘지휘자 부자’ 열전

임석규 2023. 8. 3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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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강릉시향 상임지휘자, 윤의중 국립합창단 단장, 김광현 전 원주시향 지휘자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의 반대 속에 지휘를 배워 위대한 지휘자 반열에 오른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유튜브 갈무리

지휘자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상임지휘자. 이 자리를 제안하는 전화가 아들이 아닌 아버지에게 잘못 전달되고, 각자 지휘자로 일가를 이룬 두 사람 사이엔 감정의 파고가 일렁인다. 최근 개봉한 영화 ‘마에스트로’는 부자(父子) 지휘자라는 흔치 않은 관계를 다룬다.

지휘자 정명훈의 셋째 아들인 정민은 현재 강릉시향 상임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스테이지원 제공

“오~, 노우!” 강릉시향 상임지휘자 정민(39)이 지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 정명훈(70)이 놀라면서 보였다는 반응이다. 국내에서도 지휘자 아버지가 아들의 지휘를 말리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아들의 험난한 앞날에 대한 염려에서다. 정민은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더블베이스,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지휘는 스무살 넘어 시작했다. 아들이 지휘에 의욕을 보이자 아버지는 결국 부산의 보육시설 ‘소년의집 오케스트라’를 소개해줬다. 2007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정민은 이제 일본과 이탈리아에서도 자주 공연한다.

‘지휘자 삼부자’로 불리는 윤의중(오른쪽부터) 국립합창단 단장과 부친 윤학원 전 인천시립합창단 단장,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있는 아들 윤석원. 윤의중 제공.

국립합창단 윤의중(60) 단장은 아버지가 지휘자였고, 아들도 지휘자 코스를 밟고 있는 ‘지휘자 삼대’의 일원이다. 윤 단장도 지휘자가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의 강한 만류에 맞닥뜨려야 했다.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너 지휘하면 망한다’고요. 상당히 강하게 말리셨어요.”

윤 단장의 부친이 한국 ‘합창계의 백전노장’으로 불리는 윤학원(85) 전 인천시립합창단 단장이다. 아버지의 지휘하는 모습을 흉내 내며 놀던 아들은 대학에서 지휘가 아니라 바이올린을 전공했는데, 미국 유학 시절 결국 지휘로 전공을 돌렸다. 윤 단장 역시 처음엔 말렸다고 한다. “지휘자는 일단 숫자가 적잖아요. 그중에서도 상위 몇 퍼센트에 들지 않으면 쉽지 않거든요.” 윤 단장 아들은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 ‘마에스트로’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와 그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1890~1956)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오페라를 많이 지휘했고,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무대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베를린 국립극장을 이끌던 에리히는 나치에 항거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뒤, 아들 이름도 독일식 ‘칼’에서 남미식 ‘카를로스’로 바꿔버렸다.

에리히는 아들 카를로스가 지휘자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증언이 있다. 아버지는 친구에게 “아이가 음악에 재능이 있어 안타깝다”는 편지를 보냈다. “에리히가 아들을 취리히 공과대 화학과에 억지로 떠밀어 넣었다”는 게 클라이버 집안과 친분이 깊은 독일 지휘자 미하엘 길렌(1927~2019)의 회고다. 카를로스의 전기를 쓴 찰스 바버는 “아버지는 아들을 음악인 경력에서 떼어놓으려 애썼고, 아들은 이에 분개했다”고 썼다. 에리히의 전기를 쓴 존 러셀은 “아들이 감히 자신의 길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 일을 잘하게 되었을 때 그들 부자 사이엔 정말로 신화에서나 볼 만한 균열이 벌어졌다”고 썼다.

아버지는 왜 그토록 아들의 지휘를 막으려 했을까. 허영심 때문이라고 존 러셀은 진단한다. “에리히는 클라이버란 성이 자신 이외에 쓰이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자기 아들이라도 말이죠.” 찰스 바버는 “지휘계에선 부자 관계가 드물다”며 “자아가 유난히 두드러지게 표출되는 그 직업군의 특성과 관계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분석했다.

지휘자 아버지와 지휘자 아들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영화 ‘마에스트로’. 티캐스트 제공

음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카를로스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뮌헨의 작은 오페라 극장에서 보조지휘자로 일하며 실력을 갈고닦았다. 지휘자로 공식 데뷔할 때도 ‘칼 켈러’란 가명까지 쓰면서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이란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가명을 쓴 건 아버지 에리히의 권유였다”고 클라이버는 나중에 술회한다. 카를로스는 ‘아빠 찬스’를 쓰지 않고 위대한 지휘자 반열에 올랐다. 2011년, 영국 음악전문지 비비시(BBC) 뮤직매거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선정했다. 콜린 데이비스, 마리스 얀손스, 구스타보 두다멜 등 당시 활동하던 현역 지휘자 100명의 투표로 나온 결과여서 토를 달기 어려웠다. 2위는 레너드 번스타인, 3위엔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김광현 전 원주시향 지휘자도 국립합창단, 서울시립합창단 단장을 역임한 아버지 김명엽 전 연세대 교수의 반대를 뚫고 지휘자의 길을 걷고 있다. 프레스토 컴퍼니 제공

김광현(42) 전 원주시향 지휘자 역시 음악가가 되기 위해 아버지의 강한 반대를 뚫어야 했다. 그의 부친 김명엽(79) 전 연세대 교수는 국립합창단 단장, 서울시합창단 단장을 역임한 ‘합창계 원로’다. 김광현이 지휘자의 꿈을 키운 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초등학생 시절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공연을 봤는데, 지휘대엔 합창을 연습시키던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지휘자가 있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속이 상했고, 언젠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돼서 복수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합창이 포함된 대형 기악곡이나 오페라는 포디엄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만 오르고, 합창단 지휘자는 공연이 끝난 뒤에야 소개된다.

지휘자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음악 자체를 반대했고, 김광현의 예원학교 진학을 1년 이상 반대했다. “지휘자란 직업 자체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지 못하면 직업 자체를 가질 수 없잖아요. 아버지는 그걸 잘 아셨던 거죠.”

물론, 모든 ‘지휘자 부자’의 관계가 다 같은 건 아니다. 노장 네메 예르비(86)는 두 아들 파보 예르비(61), 크리스티안 예르비(51)와 ‘지휘자 삼부자’를 이루며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루체른 심포니를 이끌고 내한해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협연한 지휘자 미하엘 잔데를링(56)도 아버지 쿠르트 잔데를링(1912~2011), 형 슈테판 잔데를링(59)과 함께 ‘지휘자 가족’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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