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찐팬'이었던 소녀…첫 흑인 입자물리학 교수 됐다
신간 '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친구 이름은 정지윤이었다. 고교 시절 단짝이자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그 애가 소개해 준 K팝은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흑인 소녀는 침실 문에 H.O.T.의 강타 포스터를 걸어두었다. K팝 외에 그가 몰두한 건 수학과 과학이었다. 열한 살에 스티븐 호킹에게 메일을 보내 이론물리학자가 되는 방법을 물었다. 호킹 대신 답변한 대학원생은 일류대학에 입학해 박사과정에 들어가 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범생이던 흑인 소녀는 그걸 그대로 실천했다. 그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하버드대에 입학했고, 대학원을 거쳐 2019년 흑인 여성 최초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물리학 교수가 됐다. 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 미국 뉴햄프셔대 물리학·천문학 교수 얘기다.
그가 쓴 '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원제: The Disordered Cosmos)는 입자물리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미국 과학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성차별을 조명한 책이다. 사회운동가이자 성소수자인 저자는 비주류의 시선으로 우주의 아름다움 속에 존재하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다.
책에 따르면 흑인은 흔히 암흑물질에 비유된다. 암흑물질이란 중력을 통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전자기파를 비롯한 다른 수단으로는 전혀 관측되지 않는 물질이다. 흑인도 존재하는 게 분명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당한다는 점에서 암흑물질과 비슷하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저자는 1952년 발표된 랠프 엘리슨의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흑인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현재 흑인들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엘리슨은 책에서 "나는 실재하지만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흑인들이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벗어나려면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은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한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견뎌야 한다. 저자도 그런 압박감을 견뎠다. 그는 "흑인 여성으로서 무너뜨려야 할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평범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비범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썼다.
사회적 차별뿐 아니라 성폭행이라는 고통도 당했다. 대학원생 때 과학학회에 참석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는 십여 년 전 벌어진 일이지만 여전히 매일 곱씹을 정도로 고통 속에 살아간다고 한다. 그 남자가 했던 모욕적인 말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간은 내 과학 일대기의 일부이다. 매일 강간을 생각하며, 매일 과학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강간을 생각하는 매 순간 내 삶에서 시간이 깎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때 저자는 물리학의 기본 방정식을 풀면 나머지 우주의 질서가 올바르게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저자는 과학이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권력은 백인 남성의 권력이다. "백인우월주의의 천막"은 여전히 미국 과학계를 뒤덮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관찰과 데이터를 판단하는 권력에 질문을 던지며,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며, 흑인이 암흑물질이 아닌 다른 사람과 똑같은 "빛나는 물질"이라는 존재를 인지하며 묵묵히 걸어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권리는 단순히 음식, 물, 주거지, 보건, 법 아래의 평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접근하고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며 영감을 받는 행위는 선택된 소수가 누리는 사치가 아니라 인권이었어야 한다. 자유를 향해 절박하고 위험하게 탐구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서 밤하늘을 알고 이해할 권리를 포함한 모두의 인권을 요구해야 한다."
휴머니스트. 고유경 옮김. 432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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