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빚더미에 쌓인 필리핀 마을 ‘엑시’ 휩쓴 필리핀 마을 가보니 게임 가상자산 현금화해 수익 고수익에 마을사람 85% 투자 1년 만에 휴지조각… 충격·한숨 P2E 세계 유저 한때 월 평균 280만명 너도나도 큰돈 벌자 갑부 꿈꾸며 올인 끝없이 오르던 가상자산 99%나 폭락 “1년째 빚 갚는 중… 지인은 감옥에 가” 게임업체만 5조원 매출 ‘돈방석’ 씁쓸
울퉁불퉁한 필리핀 시골 도시 ‘카바나투안’(Cabanatuan)의 도로. 조악한 포장 상태 때문에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도로 양옆으로 가드레일처럼 늘어서 있는 민가와 가게 안으로 흙먼지가 들이친다. 지난 6월 방문한 이곳은 한창 바쁠 오후 시간임에도 필리핀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인적이 뜸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벌거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뿐이었다.
“원래는 마을이 이렇게 조용하지 않았다.” 옷가게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던 나니 미파가(52·여)가 무겁게 입을 뗐다. 미파가는 이 마을 토박이로 가족과 함께 옷과 휴대전화 용품 등을 파는 잡화점을 운영 중이다. 그는 “게임 엑시인피니티(Axie Infinity)에 사용하는 가상자산 스무스러브포션(SLP)의 가격이 폭락한 이후 충격을 받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아져 동네가 좀 조용해진 것 같다”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던 2021년. 게임으로 임금의 3∼4배를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며, 카바나투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마을이 게임에 뛰어들었다. 엑시인피니티는 베트남 스타트업인 스카이마비스(Sky Mavis)가 2018년 출시한 P2E(Play to Earn), 이른바 돈 버는 게임이다. ‘엑시’라는 자신의 몬스터를 활용해 다른 몬스터와 대전을 하거나 몬스터끼리 교배를 시켜 새로운 몬스터를 만들어내는 등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보상으로 SLP를 얻고 이를 현금으로 교환해 수익을 낸다.
SLP가 폭락하기 전인 2021년에는 전 세계 월평균 유저가 280만명에 달할 정도로 게임이 흥행했다. 특히 사행성 등을 이유로 P2E 게임을 허가하지 않는 우리나라나 베트남과 달리 P2E 게임이 허용된 필리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을 사람의 85% 정도가 한때 엑시 유저였다. P2E에 빠진 이 마을은 당시 화제가 돼 유튜브와 외신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미파가 역시 엑시 유저였다. 한때 큰돈을 만지기도 했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34만페소(약 800만원)가량의 빚뿐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필리핀의 하루 평균 최저 임금은 570페소(약 1만3460원)로 평균 월급은 1만1400페소(약 27만원)에 불과하다. 34만페소면 28개월치 임금인 셈이다.
미파가는 엑시인피니티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21년 초,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소개로 처음 이 게임을 접했다. 그녀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매달 옷가게 월수입과 비슷한 1만5000페소를 벌었다고 한다.
미파가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결심했다. 그는 은행, 친구 등 돈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돈을 끌어모아 당시 한화 40만~50만원 정도였던 엑시 몬스터 여러 마리를 구입해 이른바 ‘매니저’가 됐다. 매니저는 스콜라(엑시를 빌려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엑시를 빌려주는 대가로 수익의 약 50%를 수수료로 받아 추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과 남편 등 가족 모두가 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게임이 일종의 가족사업이 됐고 월 최대 20만페소를 벌어들였다.
◆SLP 1년 만에 99% 폭락… 빚에 ‘감옥’까지
그러나 달콤한 꿈이 깨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끝없이 오를 것만 같았던 SLP 가격이 2021년 5월을 정점으로 구멍 난 낙하산처럼 수직 낙하했기 때문이다.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에 따르면 2021년 5월2일 406원이었던 SLP 가격은 일주일 만에 230원으로 반토막났고, 한 달 뒤에는 179원으로 쪼그라들었다. 2022년 5월부터는 6원대에 진입했고, 현재는 1.9원까지 곤두박질쳤다. 2년 만에 SLP의 가격이 최고가의 0.2% 수준으로 떨어져,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현재 미파가에게 남은 건 빚뿐이다. 그동안 번 돈은 엑시를 사는 데 재투자해 저축한 돈이 한푼도 없어서다. 그는 “벌써 1년 넘게 온 가족이 빚을 갚고 있는데 아직도 많이 남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파가의 경우는 그나마 희망적인 편이다. 적어도 본업과 게임을 병행해 SLP 폭락 이후에도 꾸준한 수입원이 있어서다. 안타깝게도 롤란도 카타퀴즈(32)의 친구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식수 배달용 오토바이에 걸터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어렵게 친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잠깐 해서 돈을 벌었지만 친구 하나는 폐인이 돼 집에서 나오지 않고, 또 다른 지인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갔다”며 “소개해준 사람으로서 좀 미안하다”고 말했다.
카바나투안시 샌버미크리스티(Sanbermicristi)에 사는 그의 친구는 원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스마트폰 4개를 구매해 밥 먹을 때조차 손에서 폰을 놓지 않고 엑시에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이후에는 미파가처럼 더 큰돈을 벌기 위해 가족·친척·지인 등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했고 엑시 몬스터 여러 마리를 구매해 매니저가 됐다. 그 결과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외제차를 뽑고, 새집을 최고급 가구로 채웠을 만큼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됐다. 하지만 SLP 가격이 급락하며 그동안 사들인 모든 것을 헐값에 넘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현재는 게임을 시작하기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가 됐다. 카타퀴즈는 “1년 반 전쯤 집, 차 등을 전부 처분한 뒤 일도 안 하고 집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마지막”이라며 “부유한 삶을 누리다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기회 되면 또 도전”… 개발사는 돈방석
엑시는 학생들의 학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보다 힘과 시간은 덜 들고 돈은 더 많이 벌 수 있어 엑시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학업을 병행해야만 하는 학생들에게는 최적의 아르바이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대부분 돈은 못 벌고 성적만 떨어졌다고 한다.
현재 항공정비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저스틴 매그사케이(21)도 그중 하나다. 친구의 소개로 엑시를 접한 그는 엑시 몬스터를 살 돈이 없어 스콜라로 시작해, 몇달 후 돈을 더 벌고자 자신의 몬스터를 구매했다. 매그사케이는 “재미보다는 돈을 번다는 생각에 공부할 때는 물론 화장실 갈 때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을 수 없었다”며 “특히 SLP 가격이 폭락할 때는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불면증까지 생겨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중상위권을 유지했었지만, 엑시를 시작한 이후 3개 과목에서 과락을 하고 전체 과목의 점수가 떨어졌다. 그는 “현재 과락한 과목들 재수강하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본 사람들과는 달리,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한 게임 업체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스타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스카이마비스는 해당 게임 출시 2년 만인 2022년에 이미 4600억여원의 투자를 받아냈다. 2022년 기준 엑시인피니티 누적 매출액은 5조1000억여원으로 추정된다. 2021년 10월에는 3조80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베트남 2대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조2000억원 이상)이 됐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만난 어느 누구도 SLP 폭락에 대한 개발사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저 ‘운이 없는’ 혹은 ‘투자 실력이 부족한’ 자신을 탓할 뿐 코인 생산 및 관리의 주체인 게임사는 죄가 없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대부분은 엑시와 같은 P2E 게임이 또 나온다면 영리하게 행동해 꼭 ‘승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손님 한 명 없는 상점가를 멍하니 바라보던 미파가는 “엑시처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어딨느냐”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그렇지 적당히 하면 옛날처럼 돈도 벌 수 있고 빚도 갚을 수 있지 않겠냐”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