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역사를 짓밟는 비극 반복…"폄훼의 미러링, 이젠 그만할 때"
중국과 멀어지면 '친중 행적' 조명
정권 바뀌면 역사적 평가도 오락가락
학계 "정치권이 여론 양극화를 조장"
“군 내부적으로 판단해 결론 내릴 수 있다면, 굳이 외부 협의는 필요 없을 것 같다."
국방부가 29일 기자회견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결정 과정에 대해 내놓은 답이다. 외부 협의가 필요 없다는 얘기는 역사학계의 평가 같은 전문가 자문을 거치지 않겠다는 뜻. 군이 역사를 재단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5년 전 추서한 '명예졸업생'을 '빨치산' 취급한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은 없었다.
정치가 시작한 '역사 논쟁'의 후폭풍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역사적 인물과 사실에 대한 평가를 학계가 아닌 정치권이 주도하고, 이념 스펙트럼에 따른 줄서기가 이어지면서 역사는 국론 분열의 무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역사학계의 반발이 심하다. "화합과 발전의 토대가 돼야 할 역사가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정치·외교에 흔들리는 '역사관'
정부가 역사 논쟁을 주도한 사례는 이전 정부에서도 계속 반복된 비극이다. 2008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에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1948년(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개국 연도로 언급하며 '건국절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를 올바르게 규정하겠다"는 명목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재인 정부는 6·25전쟁 수훈자인 백선엽 장군이 사망하자 백 장군 묘역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딱지를 붙여 논쟁을 일으켰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약산 김원봉의 '서훈 논란'도 당시 있었던 일이다.
물론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 1990년대 이후 구 공산권 국가들과 차례로 수교를 맺은 이후, 좌우 정부를 가릴 것 없이 '역사의 재평가' 작업을 활용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라 불렸던 나라의 명칭이 '중국'으로 바뀐 것도 그때 일이다.
문제는 정치인들이 주도해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인위적으로 폄훼하려고 할 때다. 문재인 정부에선 대일 관계가 경색된 뒤 백선엽 장군의 '친일 논란'이 두드려졌고, 중국과 멀어진 윤석열 정부에선 반대로 '친중 행적'(정율성)이 조명받고 있다. 이에 대해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미국의 디커플링(중국으로부터의 분리)이 본격화하면서, 한국 정부의 역사관마저도 '관념적 이익'을 고려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정치적 동기에 '표 계산'이 더해지면 역사 논란은 '국론 분열'로까지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정일영 서강대 사학과 조교수는 "최근 역사논쟁은 지지층에 어필하려는 정치적 수사로 보인다"면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제까지 쌓아 왔던 역사적 평가와 행위가 모조리 부정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양극화된 사회에 정치권이 상대를 궤멸시키는 수단으로 역사를 끌어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고 짚었다.
사회적 비용 낭비 커
부작용은 자명하다. 역사적 진실의 일면만 보려는 정치인들의 섣부른 '역사 재단'은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연구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아직 학계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인물을 정치적 필요에 의해 '빨치산'으로 낙인찍어 버리면 어떻게 연구를 하겠느냐"며 "(정부가 평가를 하기보다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공자들에 대한 연구 지원을 늘리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교수는 "(역사논쟁으로 인해) 교육 현장에서 불필요한 의문과 논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했다.
학계만의 일도 아니다.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교과서 사업은 역사학 교수 절대다수가 집필 참여를 거부할 정도로 반발이 큰 상태에서 진행된 탓에, 새 정부 집권 한 달 만에 폐지되는 흑역사를 썼다. 그 여파로 교육부는 당장 다음 연도에 사용될 검정교과서 개발 작업에 혼선을 빚어야만 했다.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정치가 국론 분열을 조장해 사회 통합 기능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역사학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는 행태가 반복되면 정권이 바뀐 후 보복적 재평가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면서 "발전 없는 '역사의 미러링'을 그만두고, 사실에 기반한 생산적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자정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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