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저 낯선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연극 ‘더 파더’, 내달 19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인자하고 유쾌했던 아버지가 변해 간다. 툭툭 모진 말을 내뱉고, 간병인을 시계 도둑으로 몰더니, 딸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당사자인 아버지도 미칠 노릇. 분명히 방금 저기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니…. 게다가 지금 날 아버지라 부르는 저 낯선 여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무도 남의 일이라 말할 수 없게 된 치매의 문제는 겪는 이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 내달 19일 개막하는 연극 ‘더 파더(The Father)’에서, 배우 부녀(父女) 전무송(81)과 전현아(52)는 악화되는 치매에도 인간적 품위를 지키려 분투하는 아버지 ‘앙드레’와 그 아버지를 돌보는 딸 ‘안느’가 된다. 두 사람이 극중 아버지와 딸로 한 무대에 서는 건 두 번째. 2003년 ‘당신, 안녕’(윤대성 작) 이후 20년 만이다. 1962년 유치진 선생의 드라마센터에 입학했던 아버지 전무송은 올해로 연기 경력이 61년,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딸 전현아도 30년째 연기를 하고 있다.
‘더 파더’는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오스카 남우 주연상을 받은 동명 영화(2020)로 널리 알려진 작품. 프랑스 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2014년작인 이 연극은 프랑스 몰리에르상,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 미국 토니상 등 세계 최고 권위 공연상을 휩쓸었다. 국내에선 2016년 국립극단이 박근형 주연의 ‘아버지’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29일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한동안 무대에 서지 않은 이유를 묻자, 전무송은 기침이 그치지 않아 고생하다 2020년 1월 1일 응급실에 실려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폐의 흉막에 고인 피를 빼내고 병상에 누웠는데 ‘이제 더 이상 연극을 못 하는 건가’ 하는 생각만 나더라고.” 회복도 덜 된 상태에서 받은 ‘더 파더’의 대본이 노배우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처음 연극을 배우던 시절부터 먼 후일 내가 배우가 되면 마지막엔 무대에서 쓰러지리라 생각했지. 몸은 완성이 조금 덜 됐지만, 이 희곡을 만나는 순간 이 작품이 그 작품이다 생각했어.” 그는 연습을 시작하며 오히려 기력을 회복해가는 중이다.
부모를 모시고 한 집에 사는 딸 전현아는 매일 운전해 아버지를 모시고 연습실로 출퇴근한다. 그는 ‘안느’를 “아버지가 다시 아기가 되어가는 걸 지켜봐야 하는 딸”이라고 했다. “내 우상과 같았던 아버지가 내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게 서글프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돌봐야 해요. 아버지가 빠져드는 혼돈을 그 머릿속 시선으로 같이 보면서, 그걸 딸과 함께 겪어나가는 관객의 마음도 더 단단해질 거예요.” 옆에서 전무송이 덧붙였다.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의 말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어요. 전쟁도, 가난도, 모든 게 그래요. 그걸 어떻게든 가장 가깝게 알려고 하는 것이 연극이에요. 연극은 그 절실함을 찾는 과정이죠.”
그러나 연습은 난관의 연속이다. 어디까지가 아버지의 착각이고 망상인지, 딸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부녀는 함께 찾아가는 중이다. 전무송은 “햄릿을 한다고 하면 햄릿이 그려지는데, 이 작품은 그림이 안 그려진다. 여지껏 해온 작품 중에 가장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려야 하는 그림”이라며 웃었다. 곁의 딸 전현아가 다정하게 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꿈과 현실, 과거와 미래가 뒤죽박죽되는 영화 ‘인셉션’이나 ‘테넷’ 같아요, 하하.”
극중 아버지는 딸에게 날선 말로 계속 상처를 준다. 이 부녀 사이엔 그런 일이 없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수학 ‘미’를 받았던 적 있어요. 그 때 손도 안 댄 문제집 뭉치로 머리를 한 번 툭 맞았던 게 전부예요. 아버지는 평생 제게 모진 말 한 마디 하신 적이 없어요.” 연영과에 들어간 딸이 첫 연극 무대에 선다며 대사를 해보일 때도 아버지는 그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좀 천천히 해’라고 했었다. 당시엔 ‘아빠랑 말 안 한다’며 홱 돌아섰던 딸은, 배우가 되고 나서도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배우가 아닌 관객이 느끼는 속도와 이해도를 강조했던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게 됐고 아버지의 배우론을 석사 논문으로 썼다. “대학에 출강하면서 학생들에게 제가 아버지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좀 천천히 해봐’ 이렇게요.”
어쩌면 증상의 경중이 다를 뿐, 보통 사람들의 삶 역시 망각과 착각, 어긋난 소통으로 가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연극은 결국 서로의 상실을 껴안고, 모자란 걸 이해하며 이인 삼각 경주하듯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 아니냐고 말한다. “그렇지. 그게 우리 사는 진실, 삶의 모습일 거예요.” 아버지의 말을 딸이 이어 덧붙였다. “결국 들여다볼수록 이 연극은 사랑에 대한, 화해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무대 위에 그런 마음 한가득 담아 드리고 싶습니다.”
공연은 다음 달 19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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