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여성들은 이제 무례한 남자에게 항의하기도 무섭다

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2023. 8. 3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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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조심히 들어가.” “들어가서 연락해.” 으레 귀갓길에 나누던 안부 인사. 간단히 인사처럼 나누던 말들을 이제는 조금 어렵게 느낀다. 뭐라고 안부를 전해야 하나,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으라고?

작년 겨울 장갑을 낀 채 이어폰을 귀에서 빼다가 왼쪽 유닛을 하수구에 허망하게 빠트렸다. 그래도 내게는 오른쪽 유닛과 본체가 남아있었지만, 상심이 너무 큰 나머지 한참을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이 없는 채로 반년을 버티다 한 달 전 결국 새로 샀다. 드디어 출근길에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을 수 있었지만, 난 더 이상 밖에서 음악을 듣지 않게 됐다. 이어폰은 다시 가방 속에 처박혔다.

어제는 길을 걷는데 한 중년 남성이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걸어가고 있었다. 버젓이 뒤에 사람이 걷고 있는데 길거리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다니. 담배 연기가 내 얼굴을 정통으로 스쳐 갔다. 나는 자연스레 담배 연기를 흩뜨리려 손을 들어 휘휘 저으며 그를 앞질렀다. 담배 냄새가 몸에 배는 게 싫었으니까.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다 문득 뒤통수가 싸해졌다. 순간 머릿속에 최근의 칼부림 사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모든 칼부림 사건에는 그 어떤 이유도 당위도 목적도 없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 방법도 모르는 채 “칼 맞을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살아남기가 큰일이 된 세상에서 길거리에서 노래 듣기는 사치가 되었다. 나에게 무례하게 구는 이에게 조금 티를 내기도 두려워졌다. 출근길 지하철이, 평일 대낮 공원이, 그냥 내가 발 딛고 있는 모든 공간, 순간이 내 죽을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내 일상을 뒤덮었다.

일상이 공포가 되는 순간은 여태까지도 많이 겪어왔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무서워한다. 예전에 인터넷 이전 설치를 하며 키즈케어 서비스라는 것이 있어 함께 신청했다. 이 서비스는 현관문이 열리고 닫힐 때 휴대전화로 알림이 오게 하는 서비스와 집 안에 설치하는 방범 카메라가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집을 비웠을 때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으니 안전장치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호기롭게 설치한 날 밤, 막상 샤워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려 하니 내 집에 들어와 있는 그 기계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앱을 통해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도록 조작해 놓았는데도 저 렌즈를 통해 누군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은 일주일 만에 서랍에 처박혔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친구들의 노트북 카메라 렌즈가 스티커나 포스트잇 등으로 가려져 있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공중 화장실 문에 난 구멍이 휴지로 모두 꽉꽉 막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나의 불안감을 키우는 것들이 있다. 최근 몇몇 범죄 사건을 뉴스보다 소셜미디어로 먼저 접했다. 소셜미디어는 알고리즘을 통해 내가 검색어를 입력하지 않아도 무작위로 전달하는데, 나는 피할 새도 없이 범죄 현장을 어떤 정보도 없이 ‘칼부림 현장’ 같은 단어만 가지고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적나라해서 마치 따라 하자면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전례 없는 정보 홍수 속에서 살고 있고, 책임감 없는 콘텐츠들은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일상이 두려움이 되고 한편에서는 폭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이런 미디어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면, 반드시 자정 작용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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