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스파냐 압도한 영국, 해양 패권 장악하고 조선에 상륙하다
1588년 잉글랜드는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상륙을 막아냈다. 훗날 스코틀랜드를 아우르며 해양 패권 국가로 성장한 영국은 영어와 그리니치 표준시로 상징되는 세계적 표준 국가로 성장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지만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나라를 지키는 것이 남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다. 지정학적으로 인접한 이웃 국가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멀리 있는 국가의 힘을 빌리는 것이 덜 위험한 선택이었다. 조선 왕실이 새로운 제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영국의 교역 요청을 무조건 거부하고, 만주 황실과 성리학적 세계관에만 의존했던 데 비해 일본은 해양 제국 영국에 편승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압도한 영국
“영결리국(永結利國·잉글랜드)은 서쪽 끝의 먼 바다에 있다. 몇 년 전, 일본으로부터 온 어느 배 한 척이 전라도 흥양(興陽·현재의 고흥)에 나타났다. 그 배는 매우 높고 컸으며, 배에 여러 개의 망루와 큰 집이 있었고, 우리 조선군이 그 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배는 달아났다. 나중에 일본 사신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영길리인이라고 말했다.”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지봉유설’에서 언급된 정체불명의 선박은 1600년에 창설된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의 배였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치열하게 경쟁했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양 패권을 놓고 세 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메리 2세가 왕이 되면서 그의 남편이었던 네덜란드 지도자 빌럼(윌리엄) 3세가 함께 왕이 됨으로써 해양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두 나라가 힘을 합치게 되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정치력은 윌리엄-메리 부부 군주가 1689년 의회와 함께 만든 권리장전에서 나왔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 헌장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이를 통해 “짐이 곧 국가”라고 했던 경쟁국 프랑스의 절대왕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민의 힘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청제국이나 대한제국의 군주들은 20세기 초 국치에 직면해서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18세기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1756~1763)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했다. 대서양 너머로 지원군을 파견하느라 프랑스 절대왕정에 가중된 부담은 1789년 대혁명의 배경이 되었다. 대혁명 직전 루이 16세는 라 페루즈 백작의 항해를 후원했다. 1785년부터 성공적 항해를 이어가던 라 페루즈 탐사 선박 2척은 1788년 태평양에서 사라졌다.
실종 전에 파리로 전해진 보고서에는 ‘꼬레아’에 관한 기록들이 있었다. 라 페루즈는 ‘켈파르(Quelpart)’라는 이름으로 제주도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러나 하멜의 책을 읽고 생긴 선입견으로 인해 상륙할 생각은 없었다고 적었다. 꼬레아 동쪽 바다의 섬은 천문관측사의 이름을 따서 ‘다쥘레(Dagelet·울릉도)’라고 명명함으로써 한반도의 부속 도서들임을 명확히 했다.
1788년 라 페루즈 탐사 선박들의 침몰은 프랑스 대양 해군의 쇠퇴를 예고하는 듯했다. 1년 후 발발한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서 왕실이 키운 해군의 정예 지휘관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 해군을 복구하고, 에스파냐와 연합함대까지 구성했지만, 영국의 해양 패권을 꺾지 못했다.
영국, 조선에 교역을 청하다
1816년 산둥반도의 위해(威海)를 출발한 맥스웰(M. Maxwell) 대령과 바실 홀 중령의 탐사대는 조선 서해안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수화를 나누었다. 2년 후인 1818년 홀이 맥스웰에게 헌정하는 탐사보고서를 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백령도와 인근 섬들은 홀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제임스 홀 군도(Sir James Hall Group)’라고 명명되었다.
1832년(순조 32) 7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온 린지(H. Lindsay, 1802~1881) 일행이 황해도를 거쳐 충청도에 상륙했다. 그들을 만난 공충(충청)감사 홍희근은 “용모는 더러는 분(粉)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양쪽 귀를 연결하는 선과 머리 꼭대기의 한가운데 선이 만나는 점)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다”고 보고했다. 로드 애머스트호에 타고 있던 67명 중 59명은 흔도사단(忻都斯担), 즉 영국 식민지 힌두스탄 출신이었다. 인도가 영국 동방 진출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한 린지 일행은 조선왕에게 바칠 예물과 함께 교역허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 관리는 청나라 황제의 칙령 없이 결정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린지 일행이 과거 코리아가 독립(independent)국가였던 증거들을 제시하며 독자적 결단을 요구하자 그의 눈은 빛났다(brightened). 그러나 지방관리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성경과 감자를 전해 준 귀츨라프
린지 일행 중 한 명은 귀츨라프(K. Gützlaff·郭實獵 1803∼1851)였다. 그는 과거 스웨덴 영토였다가 프로이센을 거쳐 현재 폴란드의 일부인 포메라니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자바에서 활동했고, 런던선교회로 옮겨 시암(타이), 천진, 마카오 등지에서 활동했다.
귀츨라프는 린지와 함께 황해도 몽금포 장산곶을 거쳐 충청도 고대도에 정박했다. 이후 원산도까지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린지 일행이 주민들과 수화 대신 필담을 나눌 수 있었던 데는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던 귀츨라프의 역할이 컸다. 귀츨라프는 성경과 함께 씨감자를 전파했다. 지역 주민과 지방 관리들은 린지 일행을 환대했지만 조정은 교역에 응하지 않았다. 조선 왕정은 지방 관리들을 파직하고, 만주 황실에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린지는 30세, 귀츨라프는 29세였다. 이 젊은이들을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들로만 보는 역사 인식은 편협하다. 조선 왕정의 망령이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북쪽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편협한 역사 인식에 기초해 있다.
영국, 거문도를 점거하고 협상을 벌이다
1883년 영국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2년 후인 1885년 4월 영국은 돌연 조선의 거문도를 점거했다. 1885년 11월 27일 자 뉴욕타임스는 영국의 새로운 동방 항구 해밀턴항(Port Hamilton), 즉 거문도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아무리 제국주의 시대라고 해도 남의 나라 영토를 무단 점거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었다.
영국의 명분은 러시아의 남진을 예방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크리미아전쟁(1853~56)에서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충돌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했고, 영국의 동방 교두보 인도를 향한 러시아의 남진을 아프가니스탄에서 틀어막고자 했다. 영국은 러시아가 1858년 청나라와 체결했던 아이훈조약의 경계, 그리고 1860년 청나라와 체결했던 베이징조약의 경계를 넘어 1861년 러시아 함대를 대마도에 정박시킨 것에 주목했다.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의 독일 출신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穆麟德)의 친러 행보는 영국의 의심을 증폭시켰다.
영국은 거문도에서 1887년 2월 철수했다. 한반도의 현상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받아낸 후였다. 홍콩에서 거문도까지 해저 전신선은 설치했지만, 조선 정부에 낼 임차료에 더해서 해군기지 건설 비용까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영국은 일본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1902년 영일동맹으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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