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55년 전 세계은행 총재가 비웃었던 한국
남들은 ‘맨땅의 헤딩’이라지만 우주항공청도 성공시키자
“13년을 검토했지요. 의사 결정이 미뤄지는 건 워낙 익숙한 일이라…. 그래도 조금 빨리 시작했더라면….”
얼마 전 만난 국내 방산업계 관계자의 말이 귓가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말한 건 KF-21 사업. 우리 공군의 전투기 개발 프로젝트다. 2001년 3월, 정부는 처음으로 국산 전투기 개발을 천명했고 이듬해인 2002년 11월, 한국형 전투기(현 KF-21) 개발이 국방 계획에 포함됐다.
하지만 이후 13년간 논쟁을 벌였고, 전투기 개발 경험이 없었던 우리 전문가들은 사업 타당성 검토만 일곱 번 진행했다. 지금 그 모든 것이 대부분 기우였음을 확인하고 있다. 2500여 명의 엔지니어와 700여 개 산학연 기관들이 항공기 개발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내년부터 양산에 들어갈 KF-21 사업은 생산 유발 효과 24조원, 기술 파급 효과 49조원, 1·2차 협력업체 고용만 1만 명(5년간)이 넘는다.
T-50 고등훈련기 사업도 세계시장에서 주목받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개발 초기 전문가들은 우리 기술 수준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제 T-50 계열 항공기는 K-방산의 핵심으로 미 해군의 고등 전술 입문기 및 공군 전술 훈련기 사업에 뛰어들 정도다. 이 사업은 총 500여 대, 50조원 규모로, 파급 효과가 340조원이다.
흔히 한국 산업의 기적을 얘기할 때 반도체, 휴대폰, 제철소, 조선소를 꼽지만 방위산업도 무시하면 안 된다. 6·25 전쟁 때 소총 한 자루 못 만들던 나라가 방산 누적 수출액 100조원 돌파를 앞두고 있다. 기적이란 이런 걸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잠시 55년 전쯤 얘기로 돌아가자. 박정희 대통령 시절 9년 3개월간 역대 최장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김정렴의 회고록 135페이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세계은행 총재이던 유진 블랙씨는 IMF 연차총회 연설에서 ‘개발도상국에는 세 가지 신화(헛된 꿈)가 있다. 첫째는 고속도로 건설, 둘째는 종합제철 건설이고, 셋째는 국가원수의 기념비 건립이다’라고 말했다”
그 무렵 인도와 튀르키예, 멕시코 등이 앞다퉈 제철소를 세우려다 실패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 한국도 제철소 짓겠다며 돈 꾸러 다니고 있었다. 세계적 경제 석학이기도 했던 유진 블랙의 전망을 무색하게 한 것은 ‘박정희-정주영’ ‘박정희-박태준’ 콤비가 주역으로 나선 ‘맨땅의 헤딩 기적’이었다. ‘맨땅의 헤딩’하면 개발시대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쯤으로 치부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매사를 맨땅의 헤딩 식으로 밀어붙이는 건 기자도 반대다. 하지만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란 대부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그나마 조기에 진화시켜준 mRNA 백신을 보라. 당시 세계적 의학자, 보건학자들의 어록에는 “코로나 백신 개발은 단기간에 불가능하다”는 장담들이 차고도 넘친다. 세상을 바꾼 것들에는 대부분 이런 과감하고도 신속한 도전이 숨어 있다.
저출산, 고령화를 물려줄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짐을 지우고 떠나는 슬픈 운명을 안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최소한의 책무는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55년 전처럼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도전 앞에 따르는 망설임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모두 잘 안다. 신속한 결정, 과감한 규제 철폐로 재무장한다면 ‘맨땅의 헤딩 기적 2.0′ 몇 개쯤 가능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우주항공청 설립도 ‘우주 경제 육성’이란 새로운 개념의 도전이다. 하지만 우주항공청 설립은 또 미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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