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마트도 밀어냈던 유통업, 10년간 오히려 후퇴했다

송혜진 기자 2023. 8. 3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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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규제법 10년… 뭘 남겼나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유통시장은 월마트와 까르푸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못 버티고 줄줄이 철수할 정도로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유통 규제가 심해지면서 유통 업체들은 성장세가 둔화하고 실적이 고꾸라지면서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지난 28일 서울의 한 대형 마트에서 고객이 장을 보고 있다. 전통 시장과 소상공인 보호를 위해 도입된 대형 마트·수퍼마켓에 대한 영업 규제가 10년이 됐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규제가 국내 유통 시장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말한다. /뉴시스

“국내 주요 3사(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의 대형 마트 국내 점포 수는 2012년 383개에서 2019년엔 423개까지 늘었다. 하지만 작년엔 396개로 거의 10년 전 수준까지 줄었다.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형 유통 업체가 과거처럼 우월적 지위를 가지기 어렵다.”

2011년 제정된 ‘대규모유통업에서의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대규모유통업법)’ 등 유통 규제법들이 급변하는 유통시장의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국내 유통산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더구나 이 법들이 제정된 2010년대 초반에는 이미 온라인 유통이 국내 유통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8%를 넘어 대형 마트를 앞서고, 쿠팡이 주문 다음 날 배송해 주는 ‘로켓 배송’을 선보이며 유통의 구조를 뒤바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입된 유통 규제법들이 10년 넘게 시행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유통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지고, 기대했던 영세 상인 보호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30일 한국경쟁법학회 주최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규모유통업법의 법체계적 지위와 주요 쟁점’ 세미나에서 국내 법학 교수들과 법률 전문가들은 “유통시장의 공정한 거래 질서 확립을 위해 도입된 법이 오히려 대형 유통 업체를 역차별하고, 결국 소비자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1년 영세한 납품 제조 업체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제정한 ‘대규모유통업법’과 2012년 전통 시장과 소상공인을 살리겠다는 목적으로 도입한 ‘유통산업발전법’이 국내 유통산업을 후퇴시켰다는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규제가 만든 잃어버린 10년”

글로벌 컨설팅 업체 딜로이트가 세계 상위 250대 소매 업체 매출을 분석한 ‘2023년 글로벌 소매 업계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업들의 평균 연매출은 226억달러(약 30조원)다. 반면 250대 업체에 들어가는 이마트·롯데쇼핑 등 우리나라 유통 기업 6곳의 평균 연매출은 112억달러(약 14조8200억원)로 절반에 못 미친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경쟁법학회 회장)는 “대규모유통업법 시행 이후 각종 규제에 막혀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개발하지 못하고, 판매 촉진 활동 또한 크게 위축된 것도 국내 대형 유통 업체들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라고 했다. 대규모유통업법은 매장 면적이 3000㎡(900여 평)가 넘는 오프라인 점포를 운영하거나 매출액 1000억원이 넘는 사업자를 대상으로, 반품 금지나 판촉 비용 전가 같은 행위를 금지한 법이다.

문제는 이 법을 전면적으로 적용하면 유통 업체들의 영업 범위 자체가 지나치게 위축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가령 대형 마트가 자체 브랜드 상품(PB)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도 ‘납품 가격을 후려쳤다’는 이유로 하도급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홍 교수는 “영세한 납품 업체를 상대로 한 유통 업체의 ‘갑질’을 막기 위한 법이었지만, 소비자에 대한 혜택을 줄이는 결과로도 나타났다”고 했다.

◇”달라진 환경 반영 못 해… 둑 헐 때 됐다”

참석자들은 현재의 대규모유통업법과 유통산업발전법이 그동안 확연히 달라진 유통 환경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대식 교수는 “이젠 온라인 쇼핑 업체들이 급성장했고, 대형 유통 업자와 인기 브랜드 상품 공급 업체 간의 역학 관계도 바뀌었다”며 “낡은 제도의 둑을 헐거나 보수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대형 마트들은 도심에 있는 매장을 물류 센터처럼 활용해 이커머스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을 못 하는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는 매장에서 온라인 배송을 할 수 없다. 보통 물류가 새벽에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면, 유통 업체에 치명적인 규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도 가까운 매장에서 편리하게 신선한 제품을 배송받지 못한다. 신영수 경북대 교수는 “거래상 지위가 거의 동등할 때도, 유통 업체와 납품 업체를 무조건 갑을 관계로 규정하고 법을 적용하면 오히려 시장 거래 질서가 왜곡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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