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극적 서사가 있는 삶

경기일보 2023. 8. 31. 03: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성연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60세에 노르웨이어를 독학해 헨리크 입센 전집을 15년 동안 완역한 공로로 한국 문화계 최초로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은 75세의 한 교수 이야기. 언뜻 예술작품 속 주인공 이야기 같지만 바로 얼마 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드라마 그 자체였던 극적 서사가 있는 삶의 여정, 그 속에서 오늘 이 시간에도 다른 작업에 매진 중인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 김미혜의 이야기다.

필자는 스승과 제자의 연으로 지난 8월3일 수훈식이 열렸던 성북구의 노르웨이 대사관저에 다녀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입센의 초상화 옆에 김미혜 교수가 번역한 책들이 한쪽에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훈장과 휘장이 진열돼 있었다. 이날 이 자리에서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노르웨이 하랄 5세 국왕이 수여하는 왕실 공로 훈장과 휘장을 김 교수에게 전달했다. 수상 소감은 평소 김 교수의 모습처럼 빛나는 눈빛에 목소리에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번역 과정의 고된 시간이 떠올랐는지 잠깐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소감문의 마지막 문장을 얘기할 때 그는 교수이면서 연극인답게 한 제자의 축하 말을 인용했다. “김미혜 교수님, 그동안의 노고에 답한 노르웨이는 문화강국입니다.” 그 순간 필자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한 편의 예술작품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연극영화과 교수이자 연극학자로서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작품의 수많은 캐릭터를 창조하거나 분석해 왔다. 그러는 동안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 교수의 집필과 번역 작업은 퇴직한 이후에도 장르를 불문하고 계속해 이어졌고 스스로 생성한 고된 시간 속에서 마침내 극적인 서사가 탄생했다. 헨리크 입센의 1879년 발표된 대표작 ‘인형의 집’의 작중인물 노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를 옥죄는 집을 박차고 나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그 시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면 이번에는 김 교수 본인이 2023년 8월 그의 인생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화제가 된 것이다. 김 교수는 노르웨이어로 쓰여진 입센의 전작 총 23편을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번역했다. 일찍이 유럽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이번 번역을 위해 직접 노르웨이어를 독학했다. 그것도 60세의 나이에. 이것이 바로 본 글의 서두에 제시한 바 있는 그의 서사다.

15년 동안 그저 한국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 작품을 번역하고 또 번역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 깊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끊임없이 애끓는 노력과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값진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김 교수의 능력은 본인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수십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려진 그의 노력이 진정성으로 변환돼 세상에 다시 없을 극적 서사를 지닌 한편의 예술작품으로 제작되었기에.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