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정은]“범인 아닌 희생자가 기억되길” 혜빈씨 유가족의 신원공개
▷‘20대 여성 피해자’로만 보도돼온 혜빈 씨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됐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기억되는 세상이었으면…”이라는 유가족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앞서 사건 당일 숨진 60대 여성 이희남 씨의 유족도 고인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슬픔을 추스를 여력조차 없는 유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남은 이들의 사생활 공개와 이로 인한 삶의 변화들도 각오해야 한다. 이런 부담을 무릅쓰고 내린 공개 결심이라 보는 이를 더 숙연하게 한다.
▷흉악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가해자의 신상은 언론에 도배된다. 서현역 흉기난동범인 최원종에 대해서도 범행 동기와 성장 배경, 정신상태 등에 대한 정보와 전문가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묻지 마 칼부림’을 비롯한 잇단 흉악범죄로 가해자 신상 공개에 대한 여론의 요구 또한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점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같은 내용이 의도치 않게 범죄자에게 서사(敍事)를 부여하는 경우마저 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그 시끌벅적함 속에 묻히거나 가려지곤 한다. 억울한 피해를 초래한 문제점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기회를 놓치게 되는 수도 있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던 사건, 사고 피해자의 이름은 이를 딴 법안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윤창호법, 민식이법, 정인이법 등은 각각 음주운전과 스쿨존 과속, 아동학대 처벌 강화와 재발 방지 내용을 담은 법에 희생자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이름과 얼굴은 그 누구라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현실 자각을 하게 만든다. 안타까움과 공분이 제2, 제3의 희생자를 막기 위한 제도 개선을 끌어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예쁜 구름을 보면 혜빈 씨가 하늘에서 그렸다고 생각할게요.” “범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인터넷에는 혜빈 씨의 이름과 얼굴을 접한 이들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범죄자 응징 같은 사회적 메시지에 앞서 사랑스러웠던 외동딸, 소중한 친구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함께 추억을 나누고자 하는 게 유가족의 뜻이 아닐까. 더 이상의 희생이 없도록 마음을 모으는 모든 이가 오늘 함께 혜빈 씨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면서 그를 기리고 또 애도할 것이다. 유가족과 지인뿐 아니라 온 사회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고 얼굴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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