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풍경, 책 밖의 이야기] ‘살풍경’ 너머 ‘원풍경’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건축 분야 등에서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감수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마음속 원초의 풍경”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원풍경’이란 단어가 있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낭만적인 장면을 떠오르게 하니, 엄혹한 현실을 뜻하는 ‘살풍경’ 속을 살아가다 만나는 원풍경은 반가움을 넘어 살풍경을 넘어설 힘을 새삼 깨닫게 한다.
요즘 책과 출판을 둘러싼 상황은 꽤 엄중하다. 특정단체가 성평등, 성교육, 성소수자 관련 도서의 열람제한과 폐기를 공공도서관에 요청하고 일부 지자체에서 이를 수용하며 금서와 검열 관련 논란이 일었고, 출판 단체에서는 세종도서, 학술원 도서, 문학나눔 사업 등 기초학술, 교양 출판 관련 예산 삭감 계획 중지를 외치며 책문화살리기 출판문화인 궐기대회까지 열었다. 살풍경이다.
출판인으로서 무엇을, 왜 만들고 있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고 어디로 향하려 하는지, 이를 위한 준비와 계획, 역량과 실행이 충분한지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겠다. 물론 이 역시 좀처럼 오르지 않는 책의 판매와 점점 줄어만 가는 독서율 앞에서는 원풍경일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거의 모든 독자의 원풍경이라 할 책과의 놀랍고 뜨거운 만남에는 유독 눈길이 가고 독자이자 출판인으로서 두 손을 불끈 쥐고 응원하며 읽게 된다.
최근 출간된 고전문학 연구자 이민희의 <18세기의 세책사>는 1990년대 초중반, 도서대여점을 주름잡은 책들을 떠올리게 한다. 세책(貰冊)이란 어휘가 익숙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였을 터, 책의 띠지 앞면에는 “세책점: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가게”라는 친절한 설명이 적혀 있고, 이를 보는 순간 200~300원을 내고 한 권의 책을 3, 4일 동안 빌려 읽은 추억이 바로 살아난다. 공공도서관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시절, 도서대여점은 동네의 문화공간 역할을 했고 숱한 베스트셀러 탄생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은 18, 19세기 책을 빌려주고 빌려 읽던 유통 방식을 중심으로, 세책점이나 도서대여 기관에 돈을 내고 직접 책을 골라 빌려 읽는 독서 행위, 독서의 대중화를 주도한 여성 독자의 소비 행위, 이런 흐름 속에서 주요 콘텐츠로 등장한 소설 읽기라는 취미 행위, 나아가 창작자와 유통업자 사이의 적절한 손익 배분이라는 경제 행위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관점을 전한다. 더불어 조선, 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슬로바키아, 미국, 브라질, 나이지리아 등 당대 전 세계의 세책 현장을 추적하는데, 지금 한국과 시대와 지역의 차이가 적잖음에도 책을 전하고 찾아 읽는 이들과 이들이 모이는 공간이 반갑고 귀해, 이미 지난 과거임에도 찾아가고 싶다.
앞선 이야기가 출판인으로서 원풍경이라면, 독자로서 원풍경은 지역에 공공도서관이 처음 들어선 때였는데, 특히 매월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사진과 표지가 등장하는 잡지 코너를 마주했을 때의 감격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전에도 책을 좋아했지만 책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존재인지 실감한 순간이다. 전직 사서 앨리 모건의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 <사서 일기>에 등장하는 장면, “내게 제일 멋진 순간을 딱 하나 고르라면, 한 도서관 이용자가 청소년 서가를 졸업하고 일반 서가로 올라간 다음 불현듯 온 도서관이 그 앞에 열리는 순간이다!”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험이라 하겠다.
누군가에게 이런 원풍경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면, 눈앞의 살풍경도 지나갈 거라는 대책 없는 기대, 넘어설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준비와 계획, 역량과 실행에 앞서 이 마음에서 출발하고 싶다.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편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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