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레즈비언 부부' 딸 낳았다···“다양한 가족 인정해야”
동성 임신으로 시선을 모았던 김규진(32)·김세연(35) 부부가 딸 ‘라니(태명)’를 낳았다.
규진씨는 30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엄지 척’ 사진과 함께 “엄마 1일차”라는 메시지를 올려 출산 소식을 알렸다.
규진씨는 지난 6월 SNS를 통해 임신 소식을 알렸고 ‘대한민국 저출생 대책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베이비 샤워를 열며 큰 관심을 받았다. 이 과정은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2020)’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지난해 12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기증받은 정자로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윤리지침상 “정자 공여 시술은 법률상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지난 2019년 관광객의 혼인신고를 허용하는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한국에서 한 차례 더 식을 올렸지만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 세연씨는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를 쓸 수 없다. 라니도 법적으로 세연씨의 딸은 아니다.
규진씨는 이날 여성동아와 인터뷰에서 지난 2월 서울고법 재판부가 ‘동성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내용을 언급하며 “행정과 입법이 사법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미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점”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부부는 “딸 ‘라니’가 어떤 세상에서 자라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라니가 저희 나이쯤 됐을 때는 엄마 둘이 있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너희 엄마는 그걸로 책도 썼냐’라는 말을 듣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세연씨 역시 “서로를 존중해줄 수 있는 사회에서 컸으면 좋겠다”라며 “이혼 가정이든 재혼 가정이든 조부모 가정이든 가족의 모습은 다양하고 다양성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라니가 크면서 ‘왜 넌 엄마가 2명이야’라는 질문을 듣게 될 수 있다”라는 말에 “다양한 가족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며 “다들 엄마 아빠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빠와, 할머니와만 사는 친구도 있다. 네가 속한 곳은 엄마가 둘인 가정이며 엄마들은 너를 너무너무 원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거 같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앞서 용혜인 기복소득당 의원은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한 바 있다. 생활동반자법 제정안은 혼인이나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아도 생활동반자로 인정해 입양·상속권 등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 골자다. 기독교 등 일각에서는 사실상 ‘동성혼 합법화’라며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15일 법무부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생활동반자법의 실질은 동성혼 제도 법제화”라며 “충분한 논의와 그에 따른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고, 저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러나 동성커플에게도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며 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소성욱씨(32)와 김용민(33)씨는 이 같은 한 장관의 발언에 날을 세웠다. 소씨는 “법무부 장관이 차별적인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겠다고 공식 채널로 밝힌 것 자체가 유감”이라고 경향신문을 통해 비판했다. 생활동반자법 반대 논거로 동성혼 법제화를 든 것 자체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소씨는 “사회적 합의가 안 됐다고 하는데 올해 갤럽 조사에서 동성혼 법제화에 찬성하는 비율이 40%를 넘겼다”면서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보다 높은 수치”라고 했다. 이어 “학교·일터 등 관계를 맺은 모든 이들이 저희 관계를 축하했다. 사회적 합의·인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치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석하려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적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 미국 UC버클리대 석좌교수도 지난 27일 “한국 정부는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하려 한다”며 생활동반자법에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 한 장관을 꼬집었다.
올해 합계출생률이 0.6명에 그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와 전 세계 꼴찌 수준인 한국이 ‘정상 가족’에만 집착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5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단위’만 ‘가족’으로 인정한 ‘건강가정기본법’을 정비해 다양한 가족 형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도록 권고했다.
실제로 프랑스는 가족 수당·무상 보육 등 복지 혜택을 혼인 여부나 가족 형태와 상관없이 자녀 위주로 똑같이 지원한 결과 현재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다산 국가가 됐다. 합계출생률은 1993년 1.65명을 기록해 저점을 찍었다가 이젠 1.8명 내외로 선진국 최고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1994년 37%에 불과했던 비혼 출생률이 지난해 64%까지 증가했다. 지난해 태어난 아기 100명 중 64명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엄마가 낳았다는 뜻이다.
특히 ‘시민연대계약’인 팍스를 맺은 동거 커플에게 결혼한 부부와 동일한 출산, 육아 지원을 한 것이 주효했다.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낳아서 키우고 싶은 남녀에게 훌륭한 대안으로 판단돼 2010년 출생률은 2명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비혼 출생은 여전히 2%대에 그치고 제도적 지원을 담은 생활동반자법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형편이다. OECD 평균 비혼 출산율이 약 40%라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저출생의 늪’을 빠져나오려면 혼인가정에만 의존해선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과 함께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비혼 출생을 포용하는 정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연합뉴스TV는 “연구 결과 한국의 혼외 출생이 OECD 수준을 따라잡으면 합계출생률도 1.55명까지 동반 상승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김태원 기자 revival@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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