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 특집] 아이들의 시간
사회적 참사는 짧게는 몇 주 동안, 길게는 몇 달 혹은 몇 년까지도 이목을 끌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심은 줄어든다. 망각과 무관심 속에서도 피해자들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 뉴스타파는 지난 2011년 처음 알려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자, 그 중에서도 어린이였던 피해자들을 만나 이들의 지난 12년을 돌아봤다. 당시 어린이였던 피해자들은 참사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채 어른이 됐거나 되어가고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무정할 정도로 부족했다.
2007년생 박하늘
2007년생 하늘이는 늦둥이다. 엄마가 더 좋은 걸 해 준다고 틀어준 가습기로 인해 앓기 시작했다. 한 번 손상된 폐 기능은 호전되지 않아 지금도 강원도 태백과 서울에 오가며 통원 치료를 받는다. 몇 달 전에는 급성 폐렴으로 혼절해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에선 하늘이에게 전용 응급실 카드를 발급해 줬다. 바깥 공기가 차가워지면 바깥출입이 꺼려진다.
응급실에 오가며 숱한 고비를 넘겨야 했던 하늘이를 위해 엄마는 집 앞마당을 정원으로 꾸몄다. ‘하늘이 정원’이다. 하늘이 침실에서도 정원이 보이도록 했다. 꽃을 보며 밝은 기운을 얻으라는 엄마의 정성이 담겼다. 취재진이 찾은 날, 두 모녀는 채송화를 심고 있었다. 채송화의 꽃말인 순진, 천진난만함처럼 하늘이도 구김 없이 성장하라는 엄마의 뜻이다.
2004년생 박동현
2004년생 동현이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폐 손상 1등급 환자다. 조금만 달려도 숨이 가빠지고 쉽게 지친다. 그런 동현에게 얼마 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신검 결과 3급, 현역 판정을 받았다. 동현이는 만성피로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국방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동현이는 폐 부전증과 기흉으로 여러 번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동현의 아빠 박기용 씨는 아들을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 청소년 중 병역의무 대상자 600여 명에 대한 신체판정기준 검토를 병무 당국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동현이는 재심 대신 입대를 선택했고 아빠는 아들의 군대 적응을 돕고 있다. 동현이는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한다. 입대 후 군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아빠는 어렵게 살려놓은 아들이 군대에서 자칫 잘못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002년생 장승원
2002년생 승원이는 입영 신체검사를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 처음 신검에선 현역 판정을 받았다. 승원이의 폐활량이 80% 이상으로 나와 군 복무에 문제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여느 아이와 달리 승원이가 간질성 폐 질환과 기흉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무시됐다.
이후 승원은 신검을 두 번 더 받았다. 세 번째 검사에서 사달이 났다. 전력 달리기 도중 승원이의 폐가 찢어졌다. 폐 일부를 들어내는 큰 수술까지 받고서야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이 나왔다. 이제 승원이는 다시는 뛰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승원은 대학생이지만 엄마와 등하교를 같이 한다. 엄마는 아들의 등하교를 위해 캠핑카를 샀다. 학교를 오가는 동안 승원은 캠핑카 침대에 누워있다. 승원이는 여느 가습기 피해자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하루 중 절반가량을 누워있거나 잠을 잔다.
2009년생 민승희
2009년생 승희네는 온 가족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다. 폐 손상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학교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결석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출결 문제로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승희 엄마는 병으로 인한 출결 인정을 받고 싶은데, 그게 여의찮다.
하늘, 동현, 승원, 승희,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작진이 만난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나서 숨을 쉬었고, 더 튼튼해지라고 젖살 얼굴에 하얀 수증기를 맞았을 뿐이다. 아이들은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고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에 갈 나이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아프다.
‘사회적 참사’로 규정된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올해로 12주기를 맞았다. 2011년 첫 피해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7,854명이 피해를 신고했고, 이 중 1,821명이 숨졌다. 2017년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만들었지만, 가해 기업의 책임 문제는 지금도 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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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목격자들 witness@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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