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간토대지진의 비극, 씻기지 않은 아픔
도쿄 시가는 거의 전멸, 요코하마도 잿더미 조선 유학생·노동자 안전, 초미의 관심사로 '민족의 비행사' 안창남 사망 오보까지 나와 이완용, 일본에 예치한 돈 날릴까 안절부절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도쿄(東京) 등 간토(關東) 지방을 강타했다. 막대한 피해를 남겼던 간토 대지진이다. 극심한 혼란 속에 조선인들도 대거 학살됐다. 그 아픈 역사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1923년 9월 3일자 동아일보에 '동경 시가(市街) 거의 전멸'이란 기사가 보인다. "동경 전 시가를 에워싼 무서운 불은 지금 궁성까지 붙어서 자꾸 타들어 가는 중이라. (중략) 전 시가는 불덩어리가 되어 삽시간에 재만 남고 이외에 요코하마(橫濱) 항구도 불 속에 들어 참혹히 타들어 가는 중이더라."
계속해서 기사는 상황을 전한다. "1일 오후 10시 30분에 각처에서 터져 나오는 불이 48곳에서 일어남에, 수도가 말라서 할 수 없이 손을 놓고 타는 대로 앉아서 보게 되었는데, 사상자가 수없이 많은 모양이더라. 요코하마 시가에는 1일 오후부터 지진과 화재가 일어나서 전 시가가 불 속에 들었는데 사상자가 몇만 명인지 모르겠고 교통기관이 전멸되었으며 수도와 식량이 모두 끊어져서 수십 만 시민은 죽을 지경에 있으므로 (중략) 대지진은 1일 정오 전후부터 5분간 내지 7분간씩 진동을 시작하였는바 진동이 강렬한 까닭으로 지진계가 결단나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진원지는 쿠와나(桑名) 방면인 듯 하다고 나고야(名古屋) 측후소는 관측하였으며, 니가타(新瀉) 관측소의 관측에 의하면 이번 지진의 진원지는 시나노가와(信濃川) 어구로부터 50미터 되는 바닷속이라더라."
기사는 이어진다. "지옥 같은 동경 전시(全市)에는 방금 계엄령이 포고되어 어떠한 사람은 물론하고 한 걸음도 들여 놓을 수 없고 식량품을 휴대한 자만 입경케 하는 중인데, (중략) 동경 정거장 부근은 4~5군데의 건물을 제외하면 전부 없어진 모양이며 제국대학도 전소되었더라."
도쿄 뿐 아니라 요코하마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23년 9월 4일자 매일신보에 '아사(餓死)에 임박한 90만 시민'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요코하마는 거의 전멸되어 수도는 끊어지고 90만명의 이재민은 물과 양식이 없어서 기갈(飢渴)을 견디지 못한다 하며, 또한 고베(神戶) 무선국에 도착한 보도에 의하면 2일 요코하마에도 계엄령이 시행되었다더라."
지진과 화재로 일시에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자 수많은 시체 처리가 또한 큰 문제가 되었다. "동경 시내에는 처처에 넘어져 있는 시체가 산 같이 쌓여 그 처치에 곤란하여 할 수 없이 그대로 들어다가 세멘트통에 몰아 넣어 화장장(火葬場)으로 운반하여 화장을 하는데, 그 사람의 성명과 주소 등은 도저히 알 수 없다더라." (1923년 9월 8일자 조선일보)
"경시청 위생부에서 19일까지 화장한 시체는 남자 8519명, 여자 7693명, 남녀 구별할 수 없는 시체 4만2560명이라더라." (1923년 9월 21일자 매일신보) "동경시에서는 오동(梧桐)으로 만든 작은 상자 3만 개를 징수해 가지고 여기에 인후골(咽喉骨) 한 개씩 넣어서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인도한다더라." (1923년 9월 20일자 조선일보)
당시 도쿄에는 조선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의 안전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번 동경의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대구 우편국에는 전보 치는 사람으로 대혼잡을 이루었다. 지난 2일 아침부터 동경에 유학 혹은 노동하러 간 아들과 형제·자매의 소식을 알아보려는 가족들은 전신계 어구를 둘러싸고 전보용지를 달라고 서로 손을 내밀며 부르짖는 것과 전보를 써 가지고 속히 놓아달라고 계원에게 애원하는 소리는 곁에서 보는 사람으로도 애타는 정을 금치 못하였다. 이제 그 수효를 들으면 2일에 500통 가량이며 3일에 1천통 가량의 다수라더라." (1923년 9월 7일자 동아일보)
이 와중에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떳다 보아라 안창남(安昌男)의 비행기~"라는 노래까지 남긴 안창남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보였다. 1923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조선의 비행가 안창남 씨가 이번 재변(災變) 중에 무참히 죽었다는 동경의 전보는 필경 우리에게 야속한 소식을 전하고 말았다! 안창남 씨는 이때까지 독신으로 있었으므로 유족은 아무도 없으나 그에게는 부모와 같이 의지하여 지내던 누이 한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아우의 놀라운 소식을 듣고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울며 불며 몸부림을 하여 그 참혹한 형상을 차마 볼 수 없으며, 자기를 동경까지 보내 달라고 야단을 하여 온 집안이 모두 난리가 난 듯 하더라."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기사도 눈에 띈다. '이완용 후작, 동경에'라는 제목의 1923년 9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이완용 후작은 조선에다가 땅을 사는데 어떠한 의심이 있었든지 금전이라는 금전은 모두 일본은행에다가 저금한다는 것은 몇 해 전부터 일반이 떠들던 바인데, 불행히 이번 진재(震災)로 인하여 그 금전의 안부를 알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조선 동포는 자질(子姪)의 안부를 몰라 걱정이건마는 이완용 후작은 돈의 안부를 알고자 동경에 자질을 둔 사람보다 못하지 않은 걱정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진재 당일부터 세상에 전하는 터이더니, 아직까지 동경 통행의 곤란이 막심함을 불구하고 황실(皇室)에 문후(問候)하기 위하여 어제 오전 10시 급행열차로 동경을 향하였는데, 금전의 안부도 알고자 함이라고 일반은 말한다더라."
간토대지진으로 경성의 물가도 뛰었다. "전고(典故)에 없던 큰 재변이 있은 후 경성 시내의 물가가 철없이 뛰기를 시작한다. 어제 오전까지 백미 한 섬에 6원이 오르고 이로 인하여 일반 음식값도 오르게 되었는데, 가장 보통 음식인 설렁탕도 5전씩이 올랐다 한다. 15전씩 하던 보통 설렁탕 한 그릇에 졸지에 5전이 오르면 종래보다 3분의 1이 오른 셈이다." (1923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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