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학기술자라는 ‘섬’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인생을 돌아보면 나는 대개 다수 아닌 소수 쪽에 속해왔다. 정원 60명인 물리학과에서 고작 8명인 여학생 중 하나였고, 대학원 동기들이 반도체 실험과 측정을 전공할 때 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택했으며, 2년씩 근무한 독일의 연구소와 영국의 대학에서도 나는 매번 학과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여성 박사후연구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사정은 썩 다르지 않았는데, 2005년 지금의 연구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 소속 부서에서 연구직 여성은 내가 유일했다.일찍이 영국 시인 존 던이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고 선언했건만, 나는 섬 아니고픈 섬이었다.
딱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직장에서도 나의 유일성은 이어졌다. 나는 연구원 최초로 육아휴직을 요청한 직원, 출산휴가에 육아휴직을 이어 붙여 사용한 최초 여직원, 무려 넷째까지 출산한 최초 여직원이 되었다. 석 줄로 단순 요약됐지만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과제 보고서를 쓰던 중 양수가 터져 맥없이 분만실에 끌려가기도 했고, 열심히 연구하던 주제가 육아휴직 뒤에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가 되어 고이 하드디스크에 잠들기도 했다. 연구 경력은 덕지덕지 이어졌다. 만약 전공이 시뮬레이션이 아니었다면 경력 복귀는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출산도 육아도 경험한 뒤에야 나만이 ‘섬’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회나 단체는 아무래도 다수를 기준으로 조직과 체계가 갖춰져 있기 마련이고, 다수가 아닌 소수는 넓은 바다에 제각기 고립된 섬으로 존재했다.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운 외딴섬 말이다. 1970년대 입사한 선배 여성 과학자는 신입 시절 기억 때문에 은퇴가 가까운 나이에도 사무실 전화는 받기 꺼려진다 하셨다. 당시는 여성이 전화를 받으면 다짜고짜 “김 박사(남성) 바꿔”로 하대했다고 한다. 전화 받는 여성은 박사일 리 없다고 본 것이다. 2009년 선배 여성 과학자가 처음으로 직장여직원회를 설립했을 때 전 직원 450여명 중에 우리는 고작 20명이었다. ‘섬’들은 비로소 서로를 알기 시작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소수의 존재는 조직에 어떤 의미일까?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매킨지가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에서 인력의 다양성은 윤리나 당위의 범주를 넘어서서 기업의 이윤과도 직접 연관되어 있다. 성별 다양성이 상위 25%인 기업은 하위 25%인 기업에 비해 평균 이상의 수익을 낼 가능성이 21%나 높았다. 이 보고서는 포용성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예를 들어 회의에 누가 위원으로 출석하는지, 발언 빈도와 횟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지를 잘 살펴야 기업 발전과 이윤 창출에 도움된다고 밝혔다. 공상과학(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세 예지자 중 한 명만 다른 예언을 냈을 때 묵살되었듯, 소수의 의견은 재고의 기회조차 없이 무시되기 십상임을, 이는 조직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주의하라는 뜻이리라.
우리 과학기술계의 다양성은 어느 정도일까? 2002년 여성의 과학기술 역량 강화 등을 위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생애주기별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력을 살펴보면, 2012년 24.6%였던 신규 채용자 중 여성 비율은 2021년 30.7%로 증가했다. 하지만 채용에서 재직, 보직 단계로 경력 단계가 상승할수록 여성 비율은 감소하면서 성별 격차가 커지는 경향은 10년 전과 동일하다. 이를 조사해온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은 경력단절 여성과학기술인의 경력 복귀를 지원하는 여러 사업과 함께 이공계 여성의 경력 성장을 돕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 W브릿지를 운영 중이다. W브릿지의 네트워킹 공간에서는 비록 서로 다른 실험실에 있더라도 서로 연결되고 멘토와 멘티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로 더욱 심화한 랜선 시대에 비록 물리적으로는 ‘섬’일지라도 더는 ‘섬’에 머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느리지만,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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