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과학에 대한 모독

남종영 2023. 8. 30. 18: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4대강]

지난 25일, 하천관리 계획에서 ‘자연성 회복’을 삭제하고 4대강 보를 존치하는 내용의 ‘국가물관리기본계획 변경안’ 공청회에서 정규석 녹색연합 사무처장(오른쪽)이 단상에 올라 펼침막을 펼쳐 든 채 발언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남종영 | 기후변화팀 기자

존경하는 환경기자 선배 두명이 있다. 한 선배는 얼마 전 퇴직했는데, 나에게 늘 기사 쓰기 전에 논문이나 보고서 등 원문을 읽으라고 했다. 마감에 쫓기는 일간지 기자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게 해보면서 새삼 놀랐다. 논문과 보고서가 보도자료를 거치고 처음의 기사에서 또 다른 기사로 거듭 참고∙인용되면서, A가 A′, A″를 거쳐 어느 순간 전혀 다른 Z로 변모하는 상황을 여러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선배는 기자실에서 항상 조용히 뭔가를 읽고 있었다. 나에게 자주 ‘공부하라’고 했는데, 소양강 수질을 연구한 박사 출신 전문기자여서 그러려니 했다. 무슨 얘기인지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자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는 거라 생각했는데, 과학을 다루는 환경기자는 공부가 더 중요했다. 공부해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과학을 편의적으로 도용하는 치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정부 들어 과학을 강조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도 16일 매일경제에 ‘지난 정부 추진된 4대강 보 해체 및 개방 정책이 비과학적’이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4대강 사업 뒤 수질이 전반적으로 개선됐는데도, 비과학적인 정책 결정으로 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새삼 과학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과학적 주장은 ‘검증 가능한’ 명제로 ‘동료 검토’(peer review)를 거쳐 학술지에 실리고 끊임없이 수정되는 특징을 갖는다. 종교적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한 닫힌 체계이기에 과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절대적 태도를 갖는 이들도 의심하는 게 좋다.

한 장관 말대로 정책도 과학에 기반해야 한다. 그래서 환경정책을 시행하기 전 정부는 동료 검토된 과학적 주장을 참고하고, 과학자들에게 길게는 일년짜리 연구용역을 맡긴다.

지난 정부 때 추진한 4대강 재자연화 정책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4대강 보가 녹조를 악화하는 등 수질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국립환경과학원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등이 학술지에 이미 실린 상태였다. 당시 환경부는 별도 연구용역을 거쳐 금강∙영산강 5개 보를 해체 또는 개방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결정했다. 그렇게 2년 동안 과학적 과정을 밟아갔다.

그런데, 뭐가 급한지 지금의 환경부는 7월20일 감사원 결과가 나오자마자 금강∙영산강 보의 해체∙개방 결정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수질예측 방법이 완전하지 않으니 “충분한 기초자료에 근거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 결과가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정권 바뀌었다고 표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자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달라고 하자, 환경부는 달랑 피피티 자료 두 개를 이메일로 전송했다. 나는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받은 것 같아 약간의 모욕감을 느꼈다.

그럼, 감사원 결과를 받아든 환경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해 동료 검토된 논문이 충분한지 살피고, 연구용역을 발주해 보완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것이 과학의 정신이다.

지난 25일 국가물관리기본계획에서 ‘자연성 회복’을 삭제하는 변경안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환경부가 밀어붙인 이 변경안이 공청회를 거쳐 국가물관리위원회에서 의결되면, 4대강 보는 존치돼 영원히 강물을 가두게 될 터였다. 나에게 공부하라던 선배는 이미 일찍 나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청회 시작 5분 전, 갑자기 환경단체 활동가 11명이 뛰어나와 단상을 점거했다. 정규석 녹색연합 사무처장이 외쳤다.

“설사 보를 존치하는 게 맞다고 칩시다. 그런데, 2년 동안 만든 계획을 연구용역 하나 없이 한달 만에 처리하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것이 환경부가 말하는 과학입니까?”

선배는 피켓을 들고 선 활동가들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시간쯤 흘렀을까. “환경단체 점거로 국가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고 유감을 표한 주최 쪽은 공청회 취소를 알렸다. 과학이라는 이름이 오용되고, 과학이 사라지고 있는 시절이다. 선배도 두달 뒤 정년퇴직해 환경기자를 떠난다.

fandg@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