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53년'…엔화 구매력 날개없는 추락

신윤재 기자(shishis111@mk.co.kr) 2023. 8. 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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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실질환율 1970년 수준으로
초장기 디플레·돈풀기 계속
엔화값 절정 대비 60% 절하
에너지·식료품 수입값 들썩
日가계지출 170만원씩 증가
수출도 기대만큼 안 늘어

달러 등 주요 통화 대비 엔화의 구매력이 5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디플레이션과 엔저(엔화 가치 약세)가 주원인으로 꼽힌다. 엔화 구매력 하락은 에너지 등 수입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일본 국민의 가계 부담을 키우고 있다.

30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일본은행이 산출한 엔화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지난 6월에 이어 7월에도 74.31로 나타났다. 올해 5월보다 약 2.3% 떨어진 수치다. 이는 일본이 변동환율제를 이행한 1973년 이후 가장 낮으며, 엔화값이 달러당 360엔으로 고정돼 있던 1970년 9월 이래 최저치인 73.7(지난해 10월)에 근접한 수준이다.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물가 변동과 무역량 등을 고려해 통화의 상대적 가치를 산출한다. 기준인 100보다 낮으면 해당 통화가 저평가됐음을 의미하며, 특정 통화의 종합적인 구매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된다. 엔화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5월에도 76.01(2020년=100)을 기록해 전달보다 2%가량 하락했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엔화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1995년 4월 193.97로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이후 전반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다가 현재는 고점 대비 60%가량 떨어진 상태다. 닛케이는 "일본이 약 30년간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엔화는 주요 통화 중 독보적으로 저렴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구매력 저하로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수입 물가다. 물건을 수입할 때 비용이 늘어 수입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닛케이에 따르면 최근 엔화를 기반으로 한 수입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엔저가 본격화되기 전인 2021년 말과 비교하면 10%가량 높다. 원유 등 에너지 외에도 식료품 가격 상승세가 두드러진다.

구매력 저하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은 일본 가계 부담으로 이어진다. 컨설팅 기업 미즈호리서치&테크놀로지에 따르면 엔화값이 달러당 145엔 전후인 현 추세가 계속되면 지난해 4월 이후 2년간 일본 가구당 부담하는 경제적 비용은 18만8000엔(약 170만원)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일본 정부의 전기·가스요금 지원과 원유 가격 억제 등 고물가 대책이 10월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 부담액은 20만엔을 넘는다.

사카이 사이스케 미즈호리서치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특히 저소득층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일본 내 식료품 가격은 광범위하게 오르고 있다. 엔저에 따른 수입 사료 가격 상승 등으로 우유와 버터 가격은 1년 전보다 8~10% 올랐다. 이탈리아산 파스타 가격도 28% 급등하는 등 수입 식료품 가격 상승세가 특히 눈에 띈다.

한편 엔저로 인한 수출 증대 효과도 기대에 못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엔화값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보다 달러당 20엔가량 떨어졌지만,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에 따르면 수출 물량은 오히려 3% 감소했다. 생산 공장 등을 해외로 옮긴 일본 기업이 늘어난 점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2021년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 비율은 26%로 20년 새 2배가량 확대됐다. 수입 가격이 오른 데 반해 수출이 기대에 못 미친 결과, 무역을 통해 돈을 벌기 쉬운 정도를 나타내는 일본의 '교역조건'은 1995년 4월 대비 약 48% 악화됐다. 닛케이는 "일본에 있는 부(富)가 해외로 유출되기 쉬운, 즉 엔저가 진행되기 쉬운 환경"이라고 분석했다.

엔화의 저평가는 다른 지표에서도 발견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각국 통화의 구매력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한 '빅맥지수'에 따르면 최근 일본에서 맥도날드 빅맥 가격은 450엔(약 4000원)으로 1995년 4월보다 15% 올랐다. 같은 기간 미국에서 빅맥 가격이 5.58달러(약 7300원)로 2.4배 상승한 것과 대비된다.

지난 29일 한때 달러당 147엔대까지 하락한 엔화값은 30일 오후 4시 현재 146엔대 초중반에서 움직이고 있다. 엔저 지속으로 일본에서 금 가격이 사상 처음 g당 1만엔을 넘어서기도 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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