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국경 소비시대 … 해외직구도 '총알배송' 뜰까
전문가 "물류허브 육성 위해
정부가 직구시장 지원해야"
◆ 매경 포커스 ◆
올해 국내 직구 시장이 7조원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알리익스프레스, 티무 등 중국 직구 앱을 통한 초저가 상품의 공습이 거세다. 중국은 전국에 보세창고를 활용한 '직구배송' 단지를 만들어 동북아 물류 허브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우리 정부도 국내 보세창고를 글로벌 물류기지로 전환시키기 위해 지난 9일 '통관물류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물류 및 전자상거래 플랫폼업계에서 원하던 '보세창고 직구배송 활용 방안'은 빠졌다. 정부 관계자는 "보세창고를 활용해 직구 제품을 국내 소비자에게 배송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라면서도 "해외 직구가 쏟아지면 소비재 제조 업체들과 수입 업체들이 망할 수 있을 정도로 파급효과를 가늠하기 어렵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정부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직구용 보세창고' 도입 여부를 놓고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한국의 '보세제도'는 가공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수출산업의 근간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의 93%가 보세제도를 활용해 이뤄진다. 반도체뿐 아니라 보세제도를 활용한 수출 비중은 바이오가 91%, 디스플레이가 88%에 달할 정도다.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공급망' 이슈가 불거지면서 보세창고를 바라보는 시각도 단순 화물창고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글로벌 물류기지로 바뀌고 있다. 정부가 '물류규제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보세창고 신설 요건 등 각종 규제를 푼 배경이다.
더 빠른 배송·반송, 소비자 편익 증대
국내 물류 기업과 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들은 보세제도의 적용 범위를 '해외 직구' 물품으로까지 확대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에서 들여오는 직구 상품을 국내 보세창고에 보관한 뒤 소비자가 주문하면 바로 배송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달라는 것이다. 보세창고를 글로벌 물류기지로 만들려는 정부 정책과도 부합한다는 입장이다.
직구란 해외 물건을 중간 도·소매업자를 거치지 않고 개별 소비자가 직접 구매하는 소비 행태다. 해외 직구의 가장 큰 장점은 세금과 부가가치세가 면세된다는 점이다. 한국 소비자가 아마존 등 미국 직구 사이트에서 상품을 구입하면 최대 200달러까지 관세를 포함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 미국 외 국가의 쇼핑몰은 150달러까지 무관세다.
직구 시장이 커지면서 소비자 불만과 함께 '반품' 및 '폐기' 문제도 늘고 있는데, 관련 업계에선 '직구용 보세창고'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 전자상거래 플랫폼 관계자는 "소비자의 '단순 변심'으로 구매를 취소할 경우 반품 운송비를 소비자가 내야 한다"면서 "소비자뿐 아니라 상당수 업체들도 '반송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반품 물건을 폐기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 해외 직구 물품은 물건이 해외에 저장돼 있어 소비자 피해가 생겨도 우리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최근 한국소비자원은 해외 직구한 에어컨의 냉방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피해가 잇따르자 소비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이 제품은 냉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정확한 제조사나 원산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전자상거래 플랫폼 관계자는 "직구 제품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국내 보세창고에 보관된 재고품은 국내 법 적용이 가능해 소비자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CJ대한통운, 롯데글로벌로지스, 한진 등 국내 대표 물류 기업들도 글로벌물류센터(GDC·Global Distribution Center) 등 인프라스트럭처 확충에 나서고 있다. GDC는 전자상거래 업체의 제품을 반입·보관하고, 개인 주문에 맞춰 제품을 분류·재포장해 배송하는 국제물류센터로 일종의 보세창고다.
기존 수입업자 역차별·제조업 고사 우려
국내 제조 업체는 "해외 직구에 지나친 특혜를 주면 값싼 직구 상품이 물밀듯이 쏟아져 생존이 어렵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와 부가세를 부담하는 수입업자들도 '조세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해외 직구는 재판매가 아닌 자가소비 목적일 경우, 관세와 부가세 면세 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연간 구매 횟수 제한이 없어 해외 직구가 대량으로 이뤄지면 이 경계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지금도 소액 면세 혜택을 받은 물건들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재판매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주류 수입 업계 관계자는 "수입신고, 식품검사, 한글표시사항 등 10개 부처의 주류 수입 관련 규정을 모두 건너뛰고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되는 해외 직구의 확대는 소량 자가소비 목적이라는 해외 직구 허용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주류의 경우 보세창고에서 통관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택배로 발송하는 형태는 주류의 온라인 판매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법과도 상충된다"고 지적했다.
국내 제조업도 빠르게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분유업계는 잇단 우유 원유 가격 인상으로 경쟁력을 잃은 상태다. 여기에 해외 분유가 '고급'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독일, 영국 등에서 들여온 분유가 인기 직구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관계당국도 해외 직구가 단기간 급속도로 늘면 분유업계 등 기존 국내 제조 업체들이 '고사'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해외 직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통관 병목현상 심화와 세수 감소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현재 해외 직구의 95%가 면세 혜택을 받는 상황이다.
韓 직구시장, 中 알리익스프레스 폭발 성장
국내 직구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직구 규모는 47억2500만달러(약 6조3000억원)다. 유통업계는 올해 직구 시장 규모가 전년 대비 10% 가까이 늘어나 53억달러(약 7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한다. SSG닷컴과 롯데온 등 기존 유통 업체의 전자상거래 플랫폼도 '직구' 섹션을 강화하는 추세다. 쿠팡은 해외 직구 물품에 대한 배송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미국 LA국제공항(LAX) 인근과 중국 웨이하이에 물류창고를 운영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자주 찾는 물품을 공항과 항만 인근 창고에 두고 직구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배송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 물류망과 결합한 해외 직구 쇼핑 앱이 사실상 국내 직구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중국 직구 전자상거래 플랫폼 알리익스프레스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항과 옌타이항의 물류창고에서 출발하는 한중 전용 고속 화물선으로 직구 물량을 한국으로 운송하고 있다. 한 물류업계 관계자는 "중국 물류창고에서 평택항까지 배로 13시간이면 도착이 가능하다"면서 "통관 적체가 해소된다면 해외 직구 주문 후 중국에서 한국까지 '익일배송'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 앱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에 따르면 지난 7월 알리익스프레스 사용자는 476만명으로 1년 전 261만명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사용자 수로는 국내 종합 쇼핑몰 앱 중 쿠팡(2908만명), 11번가(904만명), G마켓(636만명)에 이어 4위다. 티몬(387만명), 위메프(351만명), 옥션(322만명), GS SHOP(320만명)보다도 많다. 표본조사라는 한계는 있지만 알리익스프레스가 급성장 중이란 건 유통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의 알리익스프레스에는 '무선 USB 마우스 11원, 골프 모자 96원, 슬리퍼 96원' 등과 같은 초저가 제품들이 올라와 있다. 또 다른 중국계 해외 직구 플랫폼 '티무(Temu)'도 지난달 한국에 상륙했다. 티무는 '억만장자처럼 쇼핑하라(Shop like a billionaire)'라는 광고 카피를 앞세워 아마존과 월마트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되는 쇼핑 앱에 올라섰다.
정부 "中 직구용 보세창고, 국내 적용 무리"
중국은 2014년부터 37개 해외 직구 시범 도시를 두고 보세특구에서 해외 직구 물품을 소비자에게 배송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었다. 예를 들어 한국 화장품 등을 찾는 중국 직구족들이 주문하면 산둥반도 웨이하이 보세특구 내 창고에 미리 보관돼 있던 물건이 하루 이틀이면 중국 전역으로 배송이 가능하다. 또 소비자들이 반품을 원할 경우 직구 제품들은 생산국가로 가기 전에 중국 보세특구 내 창고로 들어간다. 소비자들의 '단순변심'에 따른 반품비 부담이 덜하고 환불 대응도 용이하다는 평가다.
우리 정부는 해외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국과 달리 중국은 직구 물품에 대한 개인별 '연간' 면세 한도가 있다. 해외 직구는 식품의약품안전처, 국가기술표준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기관의 안전 요건을 면제받는데, 직구 규모가 커지면서 소비자 피해도 더 커질 수 있다. 심지어 해외 직구를 이용한 마약 거래도 사회문제가 되는 실정이다. 중국의 경우도 보세창고를 이용한 해외 직구 물품에 대해 관세는 내지 않지만 부가세는 내야 한다.
정부 관계자는 "유럽연합(EU) 등에서도 해외 직구에 부가세를 적용해 진입장벽을 만들어 놓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초국경 소비 시장의 도래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글로벌 무역 구조가 기업 간 거래(B2B)에서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국내 물류업과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중국의 거대 공룡과 경쟁하기 위해서도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한 전자상거래 플랫폼 업계 관계자는 "국내 소비자가 미국 아마존이나 이베이, 중국 알리익스프레스나 티무에 가서 구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무작정 '직구용 보세창고' 도입을 막을 것이라 아니라 과감한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기존 제도를 개선하고 보세창고를 양성화해야 정부나 업계가 기대하는 글로벌 물류 허브 육성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보세(保稅)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보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엔 주로 의류업계에서 브랜드는 없지만 품질 좋은 옷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정부는 1970년대 수출 진흥책으로 수출 의류에 사용되는 수입 원단에 대한 관세를 보류해주는 보세제도를 시행했는데, 보세창고에 보관돼 있던 수출용 의류 일부가 불법으로 국내에 유통되면서 '보세 물건'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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