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대학포럼]〈137〉인문학과 실용성

2023. 8. 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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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인문학 위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뾰족한 대안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대학에서 인문계 학과는 궁지로 몰리고 있다. 최근 10년 여러 대학에서 다수 인문계열 학과가 통폐합되는 쓰라린 구조조정을 겪었으며 또 진행중이다. 여기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실용성이다. 말하자면 인문계 학문은 실용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문학이 실용성이 적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물론 우리는 대체로 물질적 기능과 가치의 기준으로 실용성을 따지고는 한다. 인문계 학문은 그 결과물을 물질적 성능이나 가치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척도로 보면 분명 실용적 학문이 아닌 것이 맞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의 측면에서 실용성을 이야기할 때, 인문학이 지닌 실용성, 곧 인문계 학문의 사회적 기여나 쓸모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역사적 사례를 보면서 인문학의 잠재적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의 인문교육, 곧 수사학 교육의 사례다.

기원적 5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수사학이 발달하게 된다. 초기에 수사학은 그야말로 실용적 관심에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당시 잦아진 공공의 집회에서 혹은 법정에서 말을 통해 자기 입장을 밝히거나 변호할 필요가 많아지면서 '말을 통한 설득의 기술'인 이른바 '수사학'이 요청받게 된다. 수사학은 이런 점에서 당대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비체계적인 형태로 수사학(수사술)이 쓰여지다가 이것이 당대의 소피스트에 의해 젊은이를 위한 교육의 목적으로 학문적,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수사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러나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 말만 잘하는 피상적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수사학 교육은 인격을 함양하고 사회적으로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시킨다는 순수한 교육적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말이 로고스를 의미하고, 로고스가 인간됨의 핵심으로 간주되면서 수사학은 이른바 로고스를 키우는 것으로서 인간성을 함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당대에는 말을 잘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올바르고 훌륭한 인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수사학 교육 프로그램은 이후 로마시대를 거쳐 서구의 교양교육의 기본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인문교육의 전형적 틀을 제시해 주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문학 내지 인문교육으로서 수사학이 지니는 실용적 가치다. 수사학은 그 배경부터가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 등장한 것으로서 실용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즉,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을 양성한다는 데에 수사학은 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또 나름의 역할을 했다. 수사학을 요청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인간'이란 공동체 속에서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해 타자와 더불어 건전한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와는 완전히 환경과 역사가 다른 현대에서 수사학은 더 이상 실용적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의 수사학이 보여준 인문학의 실용적 의미 혹은 그 정신은 오늘날 인문학 내지 인문교육에 여전히 유효하다. 인문학이 인간성과 인간됨에 대한 학문이고, 따라서 올바르고 훌륭한 인간상 내지 공동체를 제시하는 학문이라면 과거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이 행했던 역할을 이미 수행하고 있다.

현대에서도 여전히 '좋은 인간'이란 '공동체적으로 좋은 인간'이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조화로운 공동체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해 공감과 관용의 정신을 많이 가질수록 '좋은 인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마도 이 이념만큼은 보편적이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은 항상 이 '좋은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또 이를 양성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 이 '좋은 인간'이다. '좋은 인간'이 많아져야 사회도 좋아진다. 인문학이 이를 추구하는 학문인 한, 인문학이 진정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고 또 쓰임이 많은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인철 경희대 철학과 교수, 전국 사립대 인문대학장 협의회장 heimwelt@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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