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패권경쟁 속 ‘나홀로’ R&D 예산 삭감…선택과 집중 성공할까
국가 R&D 예산 삭감은 33년 만에 처음
소규모 R&D 사업 대거 정리… 대형 과제 위주로
“R&D 개혁 성공하려면 연구 현장 자율성 담보해야”
33년 만에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현실이 됐다. 지난 22일 주요 R&D 예산 삭감이 발표되고 일주일 만인 지난 29일 기획재정부는 국가 R&D 예산 삭감안이 포함된 2024년도 예산안을 확정 발표했다.
내년도 정부 R&D 예산은 25조9152억원으로 올해(31조1000억원) 대비 16.6% 삭감됐다. 기획재정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감축분 가운데 1조8000억원은 교육·기타 부문 R&D를 일반 재정 사업으로 재분류하면서 빠진 것으로 실질적인 R&D 예산 감축 규모는 3조4000억원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예산 감소폭은 10.9%다. 16.6%든 10.9%든 국가 R&D 예산이 줄어드는 건 1991년 이후 33년 만이다.
정부는 이번 R&D 예산 삭감의 이유로 관행적·소규모 R&D 과제가 난립하면서 국가 R&D가 덩치만 커졌을 뿐 성과는 충분히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가 R&D 예산은 2018년 19조7000억원에서 올해는 31조1000억원으로 매년 10% 넘게 증가했다. 그런데 R&D 예산이 급증하는 동안 과제당 평균 연구비는 2016년 3억4662만원에서 2021년 3억5560만원으로 소폭 늘어나는데 그쳤다. 소규모 R&D 과제만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와 산업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기술 개발은 뒷전이고, 정부의 R&D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만 양산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가 R&D의 목표는 파급력 있는 성과를 창출하는 것인데 소규모 R&D 사업이 난립하면서 가시적인 성과 창출이 미흡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가 R&D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와중에 국가전략기술 관련 투자는 증가했다. 다만 국가전략기술에서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이나 감염병 대응 때문에 단기간에 대규모로 예산이 늘었거나 집행이 부진한 경우에는 예산 삭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번 예산안은 비효율을 걷어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통해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국가 경쟁력의 핵심인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점을 줬다”고 설명했다.
과학기술계는 소규모 R&D 사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기술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상황에서 R&D 투자를 줄이는 건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라는 반응이 많다. 기재부와 과기정통부는 국가 R&D 투자가 지나치게 급증했다고 하지만, 정부 총 지출 대비 R&D 투자의 비중은 지난 10년간 4%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2016년의 정부 총 지출은 386조4000억원, R&D 투자는 19조1000억원으로 이 때 총 지출 대비 R&D 투자의 비중은 4.9%였다. 올해는 정부 총 지출이 638조7000억원, R&D 투자는 31조1000억원으로 총 지출 대비 R&D 투자 비중은 4.9%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R&D 예산만 증가한 게 아니라 정부 지출 자체가 늘어나면서 R&D 투자도 함께 늘었다고 봐야 하는데, 정부 지출은 여전히 늘리면서 R&D 예산만 방만하다고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내년도 예산안에서도 정부 총 지출은 올해보다 2.8% 증가했다. 반면 R&D 투자는 16.6%가 감소하면서 정부 총 지출에서 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9%로 줄었다.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기관장은 “정부 총 지출에서 R&D 투자 비중인 3%대를 기록한 건 내 기억으로는 처음인 것 같다”며 “미국과 중국이 기술패권 경쟁을 치열하게 하고 있는 와중에 R&D 투자를 줄이는 건 기술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국가 R&D 지침은 대규모 프로젝트 위주로의 선회다. 12대 국가전략기술을 중심으로 플래그십 프로젝트 위주로 예산을 배정해 바이오, 우주, 반도체, 양자 같은 첨단 산업을 키울 기술 개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국가 R&D의 모범 사례로 1989년 민·관·산·학 협력으로 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을 꼽았다. 갈라파고스식 R&D 대신 국제 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윤석열표 R&D 전략의 한 축이다.
연구 현장에선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다. 미국도 중국도 R&D 투자를 키우고, 자율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을 쏟는 와중에 한국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출연연의 본부장급 연구자는 “미국은 국가 R&D 투자를 5년, 10년짜리 중장기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한다”며 “가뜩이나 한국은 과제 실패에 대한 부담이 큰데, 국가전략기술 중심의 대형 프로젝트만 키운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큰 기초연구는 설 자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제시하는 국가 R&D 개혁이 성과를 거두려면 연구 현장의 자율성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을 융통성 있게 써야 그나마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앞서 출연연 기관자들은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예산 집행의 자율성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기초연구를 주로 하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한 단장은 “연구에 필수적인 장비 구입도 까다로운 절차 탓에 제대로 못 하는 게 현실”이라며 “연구 현장의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정부가 이야기하는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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