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의 이름 유감‥하구로와 홍범도
지난 29일, 한국과 미국, 일본 해군 함정들이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 만났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해상 미사일 방어훈련이 목적이었습니다. 한국 해군은 율곡이이함, 미 해군은 벤폴드함, 일본 해상자위대는 하구로함이 참가했습니다. 모두 이지스 구축함입니다.
이날 저녁엔 한미일 국방장관의 공조통화도 예정돼 있었습니다. 미국 측 사정으로 갑작스레 취소되긴 했지만 국방부는 미리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새로운 한미일 협력시대의 시작이라 평가하고 공조강화를 위한 후속조치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일본 함정의 이름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하구로'는 일본 야마가타현에 있는 산 이름입니다. 동시에 태평양전쟁 당시 활약하다 1945년 5월 침몰한 일본제국 해군의 중순양함 한 척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은 전함끼리의 함포전이 막을 내리고 항공모함이 중심이 돼 항공기가 해전의 승패를 결정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이 대표적이죠.
'하구로'함은 전투기를 탑재할 수 없는 중순양함이었습니다. 하지만 1만톤이 넘는 배수량에 8인치 포를 10문이나 탑재한 무시할 수 없는 무장을 갖춘 함정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아직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1942년,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일어났던 '자바해 해전'에 참가했던 하구로함의 활약을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연합군은 '하구로'와 '나치'(하구로함과 동급 중순양함)가 어둠을 틈타 뒤쪽으로 살그머니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 '나치'는 어뢰 8발을, '하구로'는 4발을 발사했다. 이어 '더라위터르'에서는 탑승자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돌발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 배와 함께 도르만(네덜란드 해군 지휘관)과 366명의 탑승자도 바닷물에 잠겼다. … 1916년에 있었던 유틀란트 해전 이후로 최대의 해전인 자바해 해전은 이렇게 끝났다. - 존 톨런드, '일본제국 패망사' 中-
'하구로'함은 종전 직전까지 활약했습니다. 그러다 1945년 5월 버마에 고립된 일본군 기지에 군수보급 목적으로 출항했다 영국 해군에 발각됐고 침몰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76년 뒤인 2021년, '하구로'함은 일본 해상자위대의 이지스구축함으로 다시 탄생했습니다. 바로 이 일본제국 해군의 유산인 '하구로'함이 한미일 연합훈련에 참가한 겁니다.
훈련이 열린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이었습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이 나왔습니다. 국방부는 어떤 고려를 했을까요?
[기자] "꼭 이런 날 일본과 합동 훈련을 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국방부 대변인] "한·미·일 간의 훈련은 훈련의 목적과 필요성 등을 검토해서 한·미·일 간의 일정과 시기·장소 등을 협의해서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실시합니다.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국방부 정례브리핑 8월 29일 -
일본제국의 함정이 새로운 한미일 시대의 주연으로 활약할 때 한국에선 한 독립운동가를 둘러싼 색깔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입니다.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놓고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는 인물의 흉상을 치워야 한다는 국방부의 입장이 논란을 일으킨 것이죠.
흉상 논란은 해군 잠수함 이름으로도 번졌습니다. 지난 2016년 진수한 해군의 214급 잠수함 '홍범도함'입니다. 당시 해군은 "홍범도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함명으로 제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중근, 김좌진, 윤봉길, 유관순에 이어 독립운동가로는 다섯 번째로 잠수함 이름으로 명명됐습니다.
국방부는 흉상과 함께 잠수함에 붙여진 이 이름도 재검토할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국방부 대변인] "여러 가지 해군의 의견, 또 전례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해서 만약에 검토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면 검토하겠다 하는 원론적인 수준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 국방부 정례브리핑 8월 29일 -
국방부는 잠수함 명칭 변경의 필요성이 있다면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필요성에 어떤 전제 조건이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흉상이 설치된 위치의 적절성을 따지는 걸 넘어 홍범도 장군의 이력 자체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공산주의자로 규정한다면 흉상이든 잠수함 이름이든 그대로 두는 건 부적절할 겁니다.
해군은 '홍범도함'의 명칭 변경 가능성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잘라 말합니다. 하지만 국방부가 결심만 한다면 전례가 없고, 해군이 반발한다고 해서 명칭 변경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국방부는 법과 규정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군인을 '집단항명의 수괴'로 몰았다가 '항명죄'로 혐의를 낮춰 지금 이 순간에도 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덕영 기자(deok@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3/politics/article/6519657_361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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