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록] 50년 산 '한남시범', 재건축하려는데 공원이라니

신유진 기자 2023. 8. 3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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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8일 찾은 한남시범아파트. 아파트로 진입하는 입구에 '반세기를 넘는 주민들의 보금자리, 서울시는 어거지를 중단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신유진 기자

'서울시는 주민들을 살려내라.' '서울시는 53년 넘는 삶이 터전을 강탈마라.'

국내 대표 부촌으로 꼽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고급 단지들만 있을 것 같은 이 지역에 노후화가 심한 단지가 있다. 1970년에 지어져 53년 세월의 풍파를 간신히 견디고 있는 '한남시범아파트'다. 해당 단지는 조합 설립은 물론 시공사도 선정했다. 하지만 현재 조합원들은 시청 앞에서 집회를 열며 서울시와 대립하고 있다.

지난 8월18일 찾은 한남시범아파트. 차로도 올라가기 힘든 언덕 위에 120가구 규모의 아파트 4개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파트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반세기를 넘는 주민들의 보금자리, 서울시는 어거지를 중단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붉은색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입구 맞은 편엔 '서울시를 규탄한다! 행정폭력을 즉각 중단하라'는 문구의 현수막도 있었다.

단지로 진입하니 아파트 상태는 심각해 철거 전 모습과 비슷했다. 4개동 모두 멀쩡한 곳이 없었다. 외벽은 페인트칠이 모두 벗겨졌고 금이 가 있었다. 창문과 연결된 쇠가 죄다 녹슬어 쇳물이 단지 외벽에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알 수 없는 흰색 페인트는 규칙 없이 외벽에 칠해져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입구로 들어가니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은 물론 천장과 위쪽 벽은 금이 갔고 입구 유리문은 깨져있다. 한 눈에 봐도 노후화가 심각해 이 단지가 긴 세월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심각한 노후화로 재건축이 시급하지만 현재 사업은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한남시범아파트는 최근 '반값 아파트'로 불리는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의 시초이기도 하다. 서울시가 지난 1970년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공급했다. 아파트는 한남동 6개 필지와 옥수동 1개 필지 위에 세워져 있다.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특성상 토지 소유권이 없던 주민들은 2016년 정부로부터 한남동 5개 필지(4648㎡)를 사들이면서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후 2020년 8월 소규모 재건축정비사업조합이 조합설립인가를 받으면서 사업에 속도를 내게 됐다. 2021년 5월엔 현대건설을 시공사로 정해 하이엔드 브랜드인 '디에이치'를 적용했다. '디에이치 메종'이란 단지명으로 조합은 같은 해 하반기 사업시행인가를 받고 착공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현대건설과 조합은 아파트를 허물고 7345.4㎡ 일대에 지하 4층~지상 4층 총 4개동 규모의 공동주택 120가구와 부대복리시설을 신축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이후 조합은 2020년 나머지 2개 필지인 한남동 1-387번지와 옥수동 524번지도 매입하기 위해 나섰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시범아파트 /사진=신유진 기자



갑자기 등장한 공원 부지 "주차장인데?"


하지만 옥수동 524번지가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1월 서울시가 조합에 국공유지인 옥수동 524번지를 재건축사업 구역에 편입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토지 매입 불가' 처분을 알렸다. 해당 토지가 '도시계획시설 공원' 용도이기 때문이다. 해당 땅은 50년 넘게 주택 단지로 활용, 현재 아파트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7개 필지 중 5개는 사유지, 나머지 2곳은 국유지다. 서울시는 국유지 2곳 중 1곳인 한남동 1-387번지는 조합이 매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원이 아니어서 재건축 사업에 포함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사업구역에 포함시킨 뒤 나중에 해당 토지를 매각하겠단 의미다.

하지만 옥수동 필지만큼은 안된다는 게 서울시 설명이다. 194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지정 고시한 공원 내에 있는 만큼 공원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민간사업을 위해 공원 지정 해제를 할 순 없다"며 "만약 공원 지정을 해제해 토지를 매입하게 되면 선례를 남기는 것으로 향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시는 재건축 사업 땐 원래 용도인 공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한남시범아파트와 같은 이유로 서울시가 진행 중인 소송은 70여건이다. 재건축 사업을 위해 국유지 공원을 해제할 시 소송에서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조합은 옥수동 필지를 제외한 채 재건축을 추진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남시범아파트 부지의 전체 면적(7345㎡) 가운데 옥수동 필지(2119㎡)는 약 30%를 차지한다. 서민희 한남시범아파트 재건축 조합장은 "옥수동 필지를 제외하고 재건축할 경우 면적이 3분의 1이 제외돼 전체 규모도 줄어드는 상황"이라며 "서울시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닭장 아파트로 짓게 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시범 아파트 /사진=신유진 기자

닭장 같은 집을 지어도 공사비는 동일하고 결국 조합원들은 그 아파트를 매수하려고 하지 않아 주인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만한 협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서울시가 외면하고 있다"며 "옥수동 필지를 편입하지 못한다면 재건축 시 현재 조합원들의 주택 규모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는 주민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지적했다.

옥수동 필지를 재건축구역으로 편입하지 못한다면 사업면적 감소로 인해 현재 120가구에서 80가구로 줄어든다는 게 조합의 주장이다. 더 늘리지도 못할뿐더러 오히려 40가구는 강제로 현금청산을 받고 나가야 하는 셈이다.

문제의 옥수동 524번지는 공원으로 분류됐다곤 하지만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시가 50년 이상 주택 단지로 활용한 땅을 공원 용지로 판단하고 사업구역에 편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한남시범아파트 사업 지연 가능성도 커졌다.

이번 한남시범아파트 사례로 '반값 아파트'로 불리는 토지임대부 주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향후 재건축 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땅과 주택 소유자가 나뉘어 아파트를 공급하다 보니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한남시범의 경우 애당초 공원 부지임을 알면서도 그 위에 아파트를 지은 것인데 향후 분양한 토지임대부 아파트가 국유지의 여러 사정으로 사업구역에 편입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신유진 기자 yujin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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