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의약품 부족현상 심화…국내도 대비책 마련 시급
미국·유럽 등 원료 자국 생산 등 공급망 확보 방안 추진
"원료의약품 활성화·필수의약품 인센티브 등 도입 필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세계 각국에서 감기약 등 의약품 부족 현상이 심화하면서 다각적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또 다른 감염병과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의약품 부족 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30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글로벌 이슈 파노라마 제5호'를 발간했다.
협회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아목시실린 등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해열제, 진통제, 항생제 및 필수의약품의 수요가 급증했다. 반면 원료물질 및 생산능력 부족, 배송 지연, 무역 제한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타격을 받으면서 의약품 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팬데믹으로 촉발된 공급망 위기와 더불어 저가정책에 기인한 제네릭 시장 축소, 품질 이슈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세계적으로 의약품 부족 문제는 심화됐다. 이에 주요국들은 의약품 공급 안정화를 위해 법안 발의, 행정명령, 보고서 발간, 국가 및 이해관계자간 협력 등 다각적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미국, 올 2분기 의약품 부족건수 최대 5년내 분기별 최고치 기록
미국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항응고제, 간질치료제, 마취제, 진통제, 항생제 등 필수의약품을 포함한 부족 현상이 두드러졌다. 올해 초 대표 항암제 시스플라틴과 대체 항암제인 카보플라틴의 부족과 더불어 항생제, 식염수, 일반의약품 및 처방의약품에 이르기까지 의약품 부족 건수가 올 2분기 309개로 최근 5년내 분기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제네릭 시장 연구(The landscape of U.S. generic prescription drug markets)에 의하면 공급 중단이 발생하는 의약품은 주로 제네릭이었으며, 코로나19 이전부터 부족 문제가 존재했고 제네릭 의약품의 낮은 가격과 소수의 제조업체가 공급 불안정의 주요 요인으로 분석됐다.
미국의 국토안보 및 정부행정위원회는 의약품 부족의 근본 원인으로 의약품 및 원료의 과도한 해외 의존, 수요량 예측 시스템 부재 등을 꼽았다. 이밖에도 미국 의약품접근성협회는 △낮은 가격, 저마진 등 시장 요인 △정부 정책 오류 △규제 및 제조 등을 의약품 부족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여러 차례 법안 발의와 행정명령을 통해 주요 의약품의 자급도를 높이기 위한 인센티브 제공 정책 제시, 동맹국과의 협력 강화, 원료의약품(API) 자국 생산 등 공급망 안정성 확보를 위한 여러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22년 9월 의약품 등 생명공학 분야 성과물의 자국내 제조·생산을 강화하는 '국가 바이오기술 및 바이오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 관련 약 20억 달러(2조 7000억원) 이상의 투자계획 발표했다. 또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제조업체들이 재고 수준, 생산 계획 및 유통 수량에 대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면서 2022년 코로나19 및 기타 호흡기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신규 부족 의약품 수가 2021년 41건 대비 2022년 49건으로 큰 변동이 없었다고 밝혔다.
유럽, 해외 원료의약품 의존도 감소 위해 생산 장려
유럽의 경우 코로나19 이전부터 의약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지난 10년간 유럽 시장에서 시판된 제네릭 의약품 전체 품목의 평균 26%, 제네릭 의약품 중 항생제 33%, 항암제 40%가 감소했다. 호흡기 감염의 급증으로 항생제 수요 증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높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제조 지연 및 생산능력 부족으로 대부분 국가에서 의약품 수급 차질이 발생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제약 선진국 스위스도 이부프로펜, 파라세타몰과 같은 일반 진통제, 항생제 및 만성질환 치료제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난 3월 기준 최소 1000개에 달하는 약품 공급이 중단됐다. 제네릭 의약품 부족 현상에 대한 보고서(The case of Europe’s disappearing medicine cabinet)에서는 품목당 1~2개의 제조업체에 의존하는 시장 환경과 유럽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중국· 인도의 원료의약품(API, 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s) 점유율 증가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제네릭 의약품 및 바이오시밀러 협회인 메디슨포유럽(Medicines for Europe)은 최저가격에 기반한 가격정책 및 규제를 의약품 부족 및 공급망 위험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유럽의약품청(EMA)를 비롯한 관련 기구들은 지난 1월 의약품 공급 부족 조정그룹(MSSG)을 통해 항생제 부족과 관련한 주요 공급업체와 협력해 제조 역량 확대를 합의하고 해당 국가에서 승인되지 않은 의약품의 예외 공급 허용 등 일부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또 EU의 대다수 국가는 지난 5월 의약품 공급 안정성 개선을 위한 '중요 의약품법(Critical Medicines Act)'의 제정 제안에 동의했다. 이 법안은 주요 의약품뿐만 아니라 원료의약품 및 기초 화학물질의 생산을 장려해 중국, 인도 등 해외 의존도 감소를 목표로 한다. 스위스는 의약품 공급 부족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유사 원료의약품의 대체 및 비축 의약품 활용 등의 즉각적인 조치를 시행했다. 메디슨포유럽은 유럽 각 국가 차원에서 의약품 가격 책정에 대한 정책 변경과 EU 차원에서의 의약품 제조지원, 규제 최적화 및 디지털화 등 간소화된 정책 프레임워크 구현을 촉구하기도 했다.
일본 후생노동성, GMP 강화·제네릭 약 조정 등 대응방안 제시
일본은 지난 6월 기준 의약품 전체 품목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800품목 이상이 공급 정지나 출하 제한 상태로 의약품 부족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품목 가운데 75%는 제네릭 의약품이었다. 일본 제약단체연합회(FPMAJ)에 따르면 제네릭 의약품 1892개는 출하 제한으로 분류, 1021개는 공급이 정지돼 제네릭 전체 품목 중 32.5%가 공급 문제를 겪고 있는 실정이다.
제네릭 의약품 사용비율이 약 80%까지 도달한 일본은 지난 2020년 말부터 여러 제조시설의 제조품질관리기준(GMP) 위반과 품질 문제로 초래된 제네릭 의약품 부족 위기가 지속하고 있다. 2021년부터 2023년 5월까지 최소 15개의 제네릭 회사가 제조 또는 품질관리 관련 법 위반으로 제조 현장을 폐쇄했고 이 중 일부는 다른 공급업체와 계약한 제조업체였기 때문에 연쇄적으로 피해가 확산됐다.
이에 지난 6월 후생노동성은 '2023년 경제재정운영과 개혁의 기본방침'을 발표하고 제네릭 지원을 위한 의약품 상환가격 조정 등 약가 시스템 평가, GMP 위반을 줄이기 위한 규제 강화, 필요시 원재료의 공동 조달 및 투명성 개선을 통한 탄력적인 공급망 구축 등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 또 후생노동성은 의약품 공급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와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2022년 8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전담 위원회를 구성, 운영했다.
국내 원료 자급화·국가필수의약품 제도 개선 등 필요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우리나라도 향후 미지의 감염병 '질병 엑스(Disease X)'의 위협과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 시장의 변화 등 잠재적 의약품 부족 상황에 대한 경각심 고취와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효과적인 국산 백신 및 치료제의 부재에 따른 의약품 수급 문제와 해열진통제인 아세트아미노펜 등의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완화된 현 시점에도 비염, 알레르기 등 호흡기 질환 환자 증가로 인해 슈도에페드린 제제의 수급 불안정 등 의약품 부족 사태가 나타나고 있다.
협회에 따르면 지난 2022년 기준 국내 완제의약품 자급도는 68.7%, 원료의약품 자급도는 11.9%에 불과했고, 원료의약품 수입 상위 10개국 중 50.1%를 중국과 인도가 차지하고 있어 글로벌 공급망 붕괴에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협회는 의약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약품 생산·개발 역량 강화를 통한 제약주권 확보 △의약품 공급 부족 대응을 위한 범정부적 협력 체계 구축 △원료의약품 자급화 방안 마련 △국가필수의약품 제도 개선 △제네릭 의약품 품질 강화 대책 수립 등을 제안했다.
협회는 "공장 자동화·스마트화, 설계기반품질고도화(QbD) 및 연속제조공정 시스템 도입 등을 통해 제네릭 의약품과 원료의약품 생산 역량을 강화해 각국의 공급처 다변화를 우리 기업들의 의약품 수출 확대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팬데믹 위험(Disease X)에 대비해 백신·치료제 R&D 대폭 확대 및 미국의 ARPA-H*(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for Health)와 같은 혁신적인 R&D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제약주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ARPA-H: 획기적인 보건의료 기술이나 플랫폼 및 신약개발 등 혁신연구를 지원하고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감염병 백신 100일 내 개발·생산 등 신속한 대응 전략 포함.
이와 함께 "국내 원료의약품 산업의 세제혜택 및 R&D 지원 확대, 자사 생산원료 사용에 대한 약가우대 기간 연장 및 자사 포함 계열사까지 약가우대 범위 확대, 국산 원료의약품을 사용한 제네릭 의약품 가격 우대 등 국내 원료의약품 산업 활성화 정책 및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중장기적으로 기존 화학제조 방식을 대체할 바이오제조 등 지속 가능하고 비용 효율적인 제조기술을 개발 및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밖에 필수의약품 선정 기준 개선과 목록 확대를 통해 사용량이 많은 의약품의 공급 부족을 방지하고 적자 문제 등으로 필수의약품의 생산 공급이 중단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약가 인상 및 인센티브 제공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또 정부 차원에서는 철저한 GMP 준수를 위한 의약품 품질 관리 강화와 비의도적 불순물 시험 등을 실시하는 품질검증센터를 설립해 품질 고도화와 경쟁력 확보해야 하며, 기업 차원에서는 품질관리책임자, 품질담당자 등의 직무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확대 및 품질 신뢰성 보장을 위한 자체 검증·관리 시스템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권미란 (rani19@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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