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답 없는 감사원 재심의…처리기간 486일 ‘사상 최장’
감사원은 지난 5월, 한 민간 업체가 편법으로 방탄 성능 실험을 통과한 뒤 방탄복을 군에 납품했다는 감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방탄복 제조 업체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총격이 가해지는 방탄복 가장자리 3곳에만 방탄 소재를 추가로 덧댔다는 겁니다.
감사원은 해당 방탄복 제조 업체의 향후 입찰 자격을 제한하고, 방탄복 시험에 참여한 국방기술진흥연구소 연구원 2명을 징계하라고 해당 기관에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소 측과 방탄복 제조업체는 성능시험 기준을 충족했으며, 국방부 규정상 문제없는 방탄복을 납품했다며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감사 결과가 나온 다음 달에는 감사원에 재심의를 요청했습니다.
재심의는 감사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다시 한번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는 절차입니다. 피감대상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감사원법에 규정돼 있는 제도입니다.
재심의를 신청한 지 두 달여. 하지만 재심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감사원의 해당 감사 부서는 서류만 검토하고 있을 뿐, 현장 재조사 등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재심의를 요청한 업체 관계자는 "재심의 신청 이후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한 상황"이라며 "감사원이 어떤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아 답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업체 입장에선 '재심의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 '어떻게 심의를 하는지', '재심의를 위해 추가적으로 확인할 내용은 없는지' 등 궁금한 게 많지만, 감사원은 재심의 진행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법정 처리 기한은 두 달인데...올해 486일까지 증가
올해 상반기에 결과가 나온 사례들을 살펴보니, 재심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486일이 걸린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지난해에는 처리 기간이 325일이었는데 160일이 더 늘었습니다.
감사원법은 재심의 기한을 2개월(60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만 보면 법정기한 60일보다 4배 이상 길어진 겁니다.
감사원이 국회에 제출한 감사결과 재심의 처리 결과를 보면 2018년 재심의 평균 처리 기간은 287일이었습니다. 2019년과 2020년 들어서 재심의 처리 기간은 약간 단축됐다가, 2021년 평균 294일을 기록하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올해 상반기에는 사상 처음으로 재심의 평균 처리 기간이 1년을 넘겼습니다. 감사 결과에 이의가 있어서 재심의를 신청했는데, 1년 반이 지난 뒤에야 그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재심의를 신청한다고 해서 감사결과의 효력이 정지되는 것도 아니므로, 피감대상 입장에서는 이의가 있는 감사 결과가 공개된 채로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매년 낮아지는 재심의 인용.. 지난해 '0건', 올해는 '3건'.
재심의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인용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2018년 전체 재심의 신청 71건 가운데 5건이 인용됐습니다. 비율로는 전체의 7%입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재심의 신청 94건 중에 인용된 건이 아예 없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21건 중 3건만 인용돼, 인용률이 3.5%에 불과합니다.
물론 감사마다 내용이 모두 달라서, 어느 정도 재심의가 인용돼야 한다는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재심의가 1년간 단 한 건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감사원의 발표는 '을'인 피감대상의 입장에선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감사원 감사가 언제나 무결하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재심의 처리가 늦고, 인용 비율도 0%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지면서 피해를 구제하려는 '재심의 제도'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회도 수차례 지적했지만...감사원 약속은 '공염불'
국회는 2021년과 2022년 법사위 결산 등 수차례에 걸쳐 감사원의 '재심의 기한 미준수' 문제를 지적해왔습니다.
2022회계연도 감사원 결산 예비심사검토보고서
[지적사항]
- '감사원법'상 재심의 처리기한(2개월)을 준수하지 못하는 문제가 연례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국민의 신속한 권리구제 및 법률의 취지에 비춰 부적절한 측면이 있음
-2021년 재심의 처리 건 중 법정기한을 준수한 비율은 8.7%에 불과한 반면 처리 기간이 1년을 초과한 경우는 52.2%에 달함
[감사원 답변]
- 2018년 2월 재심의 부서를 신설하는 등 재심의 처리 기간 단축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으나 그간 관계인 권익보호를 위해 청구권 확대·강화에 보다 치중한 결과 업무량이 누적되는 상황이었음.
- 이에 '22년 7월 연구용역을 발주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23년 2월 재심의 신속처리를 위한 제도개선을 완료하고 그간 누적되었던 재심의 사항을 처리하고 있음
감사원이 재심의 제도 활성화와 기한 준수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은 예산 집행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국회 결산 보고서를 보면 재심의 처리에 필요한 현장조사를 위해 감사원은 국내 여비를 편성해 놨는데, 집행 실적이 매우 저조합니다.
재심의 현장조사를 위한 예산 집행률은 2021년 3.13%, 2022년 상반기 기준 0.41%에 불과합니다. 재심의를 위한 현장조사가 사실상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겁니다.
국회 법사위는 "감사원이 재심의 처리 기간 단축을 위하여 노력하고 그 지연 원인을 분석하여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재심의 처리 기간에 대한 청구인의 예측 가능성을 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주의 조처를 내렸습니다.
감사원은 "2020년부터 권고사항이나 통보사항까지 재심의 가능 대상이 확대되면서 재심의 신청이 늘어났고, 이에 재심의 안건들이 장기적으로 누적된 결과"라면서 "올해부터 약식처리 절차 등을 도입해 재심의 처리 기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현재 국회에는 감사원 재심의 절차 지연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감사원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습니다.
"감사원이 재심의 청구를 수리하였을 때에는 수리한 날부터 2개월 이내에 처리하도록 하되,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감사원이 직권으로 30일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연장에 대한 사항을 재심의 청구자에게 미리 알리도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감사원이 '재심의 2개월'이란 법정 기한을 못 지키다 보니, 현실에 맞춰 한차례 연장을 가능하게 하고 대신 연장된 기한은 꼭 지키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박주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감사원은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는 감사력을 대거 투입하면서, 정작 재심의 처리 등 피감기관의 권리 보호에는 소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심의청구 제도는 감사원의 위법, 부당한 감사로부터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내부 장치인만큼 실효성 제고를 위한 개선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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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기자 (wakeup@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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