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선생은 과연 망치로 머리를 맞았을까 [본헌터⑳]

고경태 기자 2023. 8. 3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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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픽션 : 본헌터⑳] 약사봉, 뼈의 증언
오른쪽 머리, 오른쪽 팔, 오른쪽 골반에만 상처가 난 이유는
2012년 12월5일 오전 경기 파주시 탄현면에서 열린 장 선생의 개묘행사. 오른쪽 귀 위의 함몰된 부위가 공개됐다.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범행 도구가 망치라고? 글쎄….”

선주는 고개를 저으며 빈 상자를 열었다. 제과점에서 롤케이크를 담아주는 평범한 빵 상자였다. 그곳에 노란 색깔에 동그란 형태를 띤 석고를 넣었다. 여기엔 역사적인 인물의 죽음에 대한 열쇠가 있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동물뼈의 흔적을 놓고 누구의 행위인지를 추리하고 토론하던 선주였다. 뼈의 깨진 모양을 보고 사람이 상처를 낸 건지 동물이 씹거나 긁은 것인지를 유추했다. 맹수가 씹은 경우라면 각 이빨 형태에 따라 남긴 흔적이 다르게 나타났다. 지금은 사람뼈의 깨진 모양을 보는 중이었다.

장 선생 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에서 실무자로 일하는 경호가 청주에 있는 선주를 찾아온 것은 2013년 1월이다. 장 선생이라니. 그는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 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1950년대 ‘사상계’를 창간한 언론인이자,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독재자가 가장 미워한 민주화운동 지도자였다.

그는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검찰은 “등산 중 실족에 의한 추락사”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굴러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었다. 신체에 큰 외상이 없다는 점과 오른쪽 귀 뒤의 피흘린 상처 때문에 단순 추락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의혹은 37년만인 2012년 다시 불붙고 있었다. 경호의 손에는 장 선생의 머리뼈와 골반뼈가 담긴 상자가 들려있었다.

삼백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을 탐구하고, 구석기 시대 유적 발굴현장에서 동물뼈를 만지고, 철기시대의 사람뼈로 석사논문을 쓴 선주는 갑자기 민감하고 정치색 짙은 현대사의 무대로 ‘점핑’한 걸까. 시간이 흘렀다. 버클리 유학을 마치고 1989년 귀국했다. 한국의 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에 숱한 일들이 지나갔다. 경호와의 묵직한 인연도 그중 하나였다. 덕분에 2013년의 선주는 장 선생의 의문사를 더듬어볼 기회를 가졌다.

1975년 8월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장 선생의 머리뼈(오른쪽)와 골반뼈로 만든 캐스트(주물). 함몰된 부분을 본으로 뜬 것이다. 사진 고경태

2012년 여름 큰비로 인해 장 선생 유골이 안장된 경기도 파주 공동묘지 석축이 무너졌다. 유골 이장을 기회 삼아 본격적인 검시를 했다. 오른쪽 귀 뒤편 함몰된 머리뼈를 살펴본 의사가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는 소견을 내놓으면서 유족들이 의문사 재조사를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진실규명이 급물살을 타는 흐름이 조성됐다. 12월엔 장 선생의 DNA 검출 등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다시 개묘를 해 머리뼈와 허벅지뼈 등을 CT(시티·컴퓨터 단층) 촬영했다.

이 작업을 하려면 머리뼈 등을 잘라야 했다. 2013년 2월 유골의 재입관과 장례장를 앞두고 대책위는 예우를 갖춰 장 선생을 보내드리려고 했다. 경호는 선주에게 장 선생의 머리뼈를 맞추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선주에게 장 선생의 유골 전체 사진과 함께 머리뼈와 골반뼈 실물을 가져온 것이다.

장 선생의 머리뼈는 선주의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름간 외국 문헌을 뒤지며 이 흔적의 의미를 따지기 위해 골몰했다. 장 선생 사망 직후 검시관들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웃통은 맨살이었고 바지는 입은 상태였다. 오른쪽 팔에 시퍼렇게 난 멍이 눈길을 잡아당겼다.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다. 경호가 가져온 머리뼈는 알려진 대로 오른쪽 귀 뒤가 파여있었다. 골반뼈도 오른쪽이 파여있었다. 사진 속의 오른쪽 팔 멍까지 죄다 오른쪽에만 상처가 난 셈이었다.

머리뼈에 난 함몰된 상처의 형태 가장자리가 망치의 가장자리와 같은 모양을 띤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 이미지.

장 선생의 장남 호권은 2012년 8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부친은 누가 봐도 망치로 머리를 가격당해 숨졌음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미끄러지거나 굴러떨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가격당해 살해당했다는 주장인데, 구체적인 흉기로 망치를 지목했다. 선주 역시 추락사는 아니라고 보았다. 미끄러져 굴러떨어졌다면 몸 여러 부위에 다양한 상처가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머리뼈를 아무리 봐도 망치로 때린 흔적 같지는 않았다.

망치로 맞았으면 상처가 평평해야 했다. 망치로 맞았을 때의 타격 형태를 연구한 자료들을 봐도 장 선생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무언가로부터 타격을 받았을 경우 흔적은 타격점을 중심으로 방사 형태로 뻗어 나간다. 이런 점으로 봤을 때 의도적으로 때려서 나온 흔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뾰족한 곳에 처음 부딪힌 뒤 약간 볼록한 곳에 또 한번 부딪쳤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망치였다면 또한 상처는 더 작아야 했다. 가로 7㎝, 세로 5.5㎝. 오함마로 맞아도 이 정도 크게 나올 거라고 보이지 않았다.

선주는 뼈만 보았다. 의외로 장 선생의 머리 부위 뼈의 원인에 집중해 규명한 사례는 없었다. 선주는 객관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뼈에 이런 타격과 흔적이 남을지만을 생각했다.

선주는 그날의 장면을 자기 나름대로 그려보았다. 포천 약사봉의 한 지점에서 여러 사람이 장 선생의 팔다리를 잡고 호흡을 맞춰 산 아래를 향해 힘껏 던지는 모습이었다. 정상 또는 중턱의 돌출된 지점에서 내던져 장애물에 걸리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지면에 떨어졌다면? 의식을 가진 사람은 발버둥을 칠 테니 던지기 힘들다. 던지기 이전에 다른 행위에 의해 장 선생이 기절했을 수 있다. 기절했기에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도 골절이 나타나지 않았을 수 있다. 오른쪽으로만 난 상처로 볼 때, 오른쪽 옆으로 떨어졌을 확률이 높다. 만약 골반부터 먼저 뾰족한 곳에 떨어져 부딪치고 그다음에 머리가 불규칙한 바위 표면에 닿았다면? 그리고 한 번 굴러 멈췄다면?

2000년대 초반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여러 추락의 경우를 시뮬레이션했지만 선주가 가정한 경우를 실험한 예가 없다고 했다. 물론 가설이었다. 이 가설이 맞으려면 약사봉 주검 발견지점 부근에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장소가 있어야 했다. 사람을 떨어뜨렸을 때 장애물에 걸리지 않고 낙하할 수 있는 곳. 선주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현장 조사해온 이들에게 그럴 만한 여러 지점이 있다는 답을 들었다. 그렇다면 실험을 해봐야 했다. 현장에서 여러 상황을 가정해 장 선생 생전의 체구와 비슷한 더미(인체 모형)를 만들어 떨어뜨려 봐야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2013년 3월28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열린 장 선생의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박종식 기자

장 선생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운동은 더 이상 동력을 얻지 못했다. 장 선생의 사인 규명을 둘러싼 사회적 파장이 반짝 여론을 업고 커지는가 싶더니 곧 시들어지는 분위기였다. 감식을 맡은 유명 법의학자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렸다. 머리뼈에 대한 결론도 명확지 않았다. 타살 의혹만 남았다. 선주는 본인의 뼈 감정 의견을 공식적으로 밝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 감정서를 쓰지도 않았다.

2023년 7월, 선주는 청주의 사무실 서랍에 고이 모셔둔 제과점 빵 상자를 열어본다. 그 안에 담긴 노란 색깔에 동그란 형태를 띤 석고는 장 선생의 머리뼈와 골반뼈 모형이다. 머리뼈 귀 뒷부분과 골반에 패인 흔적에 집중해 본을 뜬 것이다. 이런 모형을 캐스트라고 부른다. 대학 시절 구석기 시대 연모부터 동물뼈 사람뼈까지 여러 캐스트를 지겹게 만들었다. 라텍스, 실리콘, 섬유강화플라스틱(FRP), 경석고 등 재질도 다양하다. 이건 치과에서 많이 쓰는 경석고다. 한데 상자 속이 좀 지저분하다. 넣어둔 지 10년이 지났으니 그럴 만 하다. 장 선생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하는 육신의 분신이 이렇게 먼지 쌓인 상자 안에서 한 손에 가볍게 잡힌다니 미안하고 허무했다.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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