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가 자유시 참변과 연관? "자유시 참변 때 통곡…재판관되어 독립군 석방에 노력"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과 관계가 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두고, 홍범도 평전을 쓴 이동순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참변이 일어났던 당일 홍범도 장군은 현장에 없었고 공산주의자로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30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이동순 교수는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그 당시 이르쿠츠크로 잠깐 회의에 참석한다고 떠나셨는데 바로 그날 사태가 일어났다"며 "소식을 듣고 황급히 와보니 길가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고 동족상쟁이 타국에서 펼쳐졌다. 그래서 통곡하면서 시신을 땅에 묻고 황급히 뛰어다니면서 현장을 정리하고 나중에 재판관이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통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며 "독립군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참변으로 인해) 약 140명이 전사하고 600명 가량이 생포됐는데 생포되어 감옥에 갇힌 독립군들을 죄의 경중을 가리는 재판관으로 스스로 자청해서 참석했다"며 "그 이유는 어떻게든지 석방시키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약 30명이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다 석방됐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해당 자료에서 "자유시 참변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너무 유치찬란했다. 어떻게 한 정부의 부서를 대표하는 기관이 이렇게 치졸한 문장을 쓰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자유시 참변에 대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한 이후 일본군은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함경도 지역에 사단급 병력을 총동원해서 만주 일대에 무장 독립 단체를 모조리 파멸시킬 계획으로 만주로 출병을 시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만주 지역에 약 16개 독립운동 군소단체들이 연합해서 일단 러시아로 피신하자고 한 것"이라며 배경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래서 풍찬노숙하면서 아무르강을 건너갔고, 건너간 그곳이 '스보보드니'라고 하는 곳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유라는 뜻"이라며 "이 자유시에 약 1700명 가량 도착했는데 총기를 휴대한 군인들이 자유시로 진입하니까 스보보드니 시민들이 깜짝 놀라고 지역에서도 불안감을 가졌다. 안전 사고도 (현지 시민들에게) 위협이 되고"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러시아 측에서 (독립군에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귀하들은 독립군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나라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는 거류민이라는 통보를 하면서 무기를 반납하라고 하니까 우리 독립운동 전체 조직이 두 패로 나뉘어졌다"며 "일단 무기를 반납하자는 측과 군인이기 때문에 끝까지 무기를 반납할 수 없다고 대립하다 나중에 이념적 대립으로 갈라치기가 되어서 결국은 소련 홍군 측에서 무기반납 지지파를 앞세워 반대파를 공격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의 역할에 대해 이 교수는 "처음에는 무기는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우리가 계속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쪽으로만 고수한다면 소련 홍군 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낌새가 있다, 무기는 일단 반납하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방침이 바뀌어졌고, 여기에서도 갈등과 내분이 생긴 것 같다"고 해석했다.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로 되어 있다"라고 주장한 데 대해 이 교수는 "그 서류(이력서)를 저도 봤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다"라고 반박했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한 것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의 평생소원이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찾는 일"이라며 "공산당에 가입한 것도 당시 소련의 무력을 활용해서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겠다는 복안"이었다고 진단했다.
홍범도 장군이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참석해 권총, 상금, 친필 서명된 조선 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했고 1930년대에 작성한 이력서에는 자유시 사태 보고를 위한 한인 빨치산 대표 자격으로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고 돼 있다는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당시 대표대회를 '극동피압박민족대회'라고 규정했다.
그는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대장을 했다는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그 때 레닌이 조선의 독립투사가 모스크바에 왔다고 면담을 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만나게 된 것"이라며 "그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조선의 위대한 독립투사를 영접하면서 받은(레닌이 건넨) 기념물"이라고 말했다.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 대표 자격을 문제삼은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비정규군인데, 러시아에서는 제정러시아 정부의 군대와 싸우던 모든 볼셰비키 군대를 전부 빨치산(partisan)이라고 했다"며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이라고 불렀던 것은 제국주의의 고통을 받는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항일유격대 이런 뜻으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은 공산당에 입당은 했지만 막스나 레닌주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박헌영이나 이동휘 같이 모스크바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공산주의자와는 전혀 다르다"라며 "연금을 받기 위해 입당원서를 내야 된다든지 하는 건 생활을 하면서 받아들인 형식일 뿐이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한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내놓아 보라고 해라"라고 따졌다.
그는 흉상을 철거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면 흉상 전체를 아예 녹여서 땅에 묻어버리시거나 홍범도 장군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시기 바란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아주 정말 어렵게 귀국하신 어른을 이렇게 모욕을 주고 땅에 팽개치고 손상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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