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까지 손댄 정부…尹대통령의 확신, 도대체 왜?
정상화와 확신. 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에 담긴 의미를 압축하는 키워드다. 각종 행사에서 공개되는 발언의 수위는 날로 높아진다. 전임 문재인 정권과 야권을 향한 비판은 날이 섰다. 윤석열 정부는 상당수 국민에게 이미 '영웅'으로 각인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도 육군사관학교에서 이전하려 한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조차 "왜 이렇게까지"라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새삼스럽지 않다. 그동안의 흐름을 돌이켜보면 일관적이었다. 윤 대통령은 집권 이후를 '정상화의 시간'으로 규정해왔다. 전임 문재인 정부가 무너뜨려 놓은 나라의 시스템을 되돌리는 데 총력을 기울인 시간이었다는 얘기다.
사실상 취임 1주년 대국민 메시지였던 지난 5월9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윤 대통령은 "건물과 제도를 무너뜨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순간이다"며 "그러나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했다. 이튿날 취임 1주년 당일 국무위원 오찬에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지만 대한민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결국 29일 '2024 예산안' 발표에서도 "재정 만능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고 천명했다. 무려 23조원의 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내년 총지출 증가율을 19년 만에 가장 낮췄다. 내년 4월 총선용 예산은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를 앞두고 퍼주기 예산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파격이고 승부수다.
이는 포퓰리즘으로부터 정상화다. 대통령실 참모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현재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의 미래를 희생하는,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포퓰리즘을 망국병으로 규정하고 강력 대응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사주는 내용의 양곡관리법에 취임 후 첫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한 게 대표적이다.
집권 2년차에 이념을 아예 전면에 내세우고 국가의 방향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정상화다. 이를 위해 전선을 명확히 긋고 논란도 감수한다.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례적으로 공산전체주의를 여섯 번이나 언급하면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며 강한 어조로 규탄한 건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 대상은 일부 인사들이 종북주사파 활동 의혹 등으로 종종 공격을 받아온, 소위 586세대가 주류인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을 향한다.
윤 대통령이 전날 국민의힘 연찬회 공개 발언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비난하는 야권을 향해 "1+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며 "이런 세력들하고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합리와 과학을 무시하고 이념으로 선동하는 이들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적당한 통합 혹은 타협은 없다. 일련의 정책 추진과 발언을 국가 정체성에 직결된 문제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전날 연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어갈 그런 철학이 이념"이라고 역설한 것도 나라의 근간에 관한 문제라는 의미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최근 현안과 관련해 "대통령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본다"고 했다. 눈앞의 지지율이나 선거를 의식해 잘못된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게 현재 윤 대통령의 인식이라고 전했다.
관건은 국민 설득이 될 전망이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아무리 바른길이라고 확신해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하면 정책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비공개 시간에 국무위원들에게 "여야의 스펙트럼이 너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점잖게 이야기해서 될 일이 아니다. 국무위원들은 논리와 말을 가지고 싸우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장관들은 모두 정무직 정치인인 만큼 적극적으로 나서 공격에 대응하고 국민을 설득하라는 지시다.
[단독]尹대통령 "무엇이 옳으냐"…'홍범도 논란' 직접 언급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논란이 된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와 관련해 국무위원들에게 "뭐가 옳은지 냉정하게 보자"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와 같은 공식 회의 자리에서 홍범도 장군 논란에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9일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비공개 시간에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이전의 구체적인 결론 등을) 규정짓지는 않겠다"면서도 "한번 국무위원들도 생각해보자, 무엇이 옳은 것이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한-소 수교 이후에 많은 것이 드러나고 있지 않느냐며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활동 이력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명확한 대적관을 가지고 군 간부를 양성하는 곳(육사)이 아닌 독립기념관 등 다른 적재적소에 이전하는 게 왜 잘못됐다고 하느냐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윤 대통령은 "이념이 중요하다"며 "국정철학과 원칙을 가지고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왜 굳이 육사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설치했는지도 생각해보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칙, 즉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인 만큼 정치적 손해를 보더라도 돌파해야한다는 의지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정무적으로 내일 모레가 선거(내년 총선)고 시기적으로 역사논쟁으로 가는 게 맞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다. 차라리 얘기 안 꺼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한다"며 "정무적 판단으로는 (얘기 안 꺼내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옳으냐.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면 (윤석열 정부에서) 하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이날 재정건전성을 강조한 '2024 예산안'과 관련해서는 국민 설득을 당부했다. 윤 대통령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난 뒤에 예산이 어디로 투입되는지, 약자복지 강화 등에서 어떤 변화가 오는지 적극 홍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보조금 등이 끊긴 단체에서 공격이 들어올 텐데 각 부처에서 주도적으로 대응하라고도 지시했다.
한편 국방부는 육사 내 흉상 이전 계획을 수정해 홍범도 장군의 흉상만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도 이전 대상이다. 당초 육사 충무관 앞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 모두가 이전 대상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대첩 등에서 활동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로서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건국훈장을 받았고 2021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또다시 추서됐다.
그러나 공산주의 활동 이력으로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논란도 계속됐다. 공산주의 세력 등이 개입된 독립군 내 분파 간 유혈 충돌로 대규모 사상자를 냈던 1921년 자유시 참변 때 러시아 공산 세력에 협조함으로써 독립군들을 처벌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 권총까지 선물 받았던 홍범도 장군은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정식 가입하고 말년을 소련에서 보냈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육사는 전쟁에 임하고 주적을 분명히 하고 대적관이 확실해야 하는 곳"이라며 "육사 생도의 정훈교육이 중요한 이유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전선에 있는 생도들에게는 확고한 안보관, 국가관, 역사관이 제공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역대 대통령들이 인정한 만큼 독립운동가로서 홍범도 장군의 업적은 기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육사에 전시할 수는 없는 인물이라는 게 윤석열 정부의 입장이다.
박종진 기자 free2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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