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29] 무 한 조각 썰고 칼을 칼집에 넣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여.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점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추락은 편한 점도 있으니까. 그건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걸 감추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후 평생 그 이자를 갚느라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초등학생 때 어린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 있다. 반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거나 이야기 듣고 손뼉 치는 게 전부였지만 ‘어른 마음 아이 마음 한마음이 된대요’라던 가사는 지금도 기억한다. 조명이 태양처럼 내리비치고 커다란 방송 카메라가 여기저기 돌아가는 무대에 선 경험은 어린 시절이 남긴 강렬한 기억 중 하나다.
광주 MBC가 주관해 온 ‘정율성 동요 경연 대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9년간 열렸다. 학교장 추천으로 참석한 어린이 합창단은 자유곡과 함께 정율성 작곡 동요 한 곡을 의무적으로 부른다. 노랫말 속 ‘노동자 아저씨’도 이상하지만 ‘우리 조선 대원들, 조국을 사랑하죠’의 조국은 중국일까, 북한일까?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에 이어 월북 후 ‘조선인민행진곡’으로 6·25 남침 때 북한군의 사기를 높인 작곡가를 기념하는 사업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다. 공원 하나 못 짓게 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국제 음악회, 동상과 초등학교 담벼락 벽화도 없앨 수 있나?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 함께 북한을 찬양한 통영의 윤이상 기념관을 비롯, 전국 각지에 만개한 이념의 전시장을 모두 걷어낼 작정인지 먼저 묻고 싶다.
참가 팀이 적어서인지 논란이 되는 탓인지 ‘더 알차고 풍성하게 준비하겠다’던 10주년 동요제 공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9년간 대회에 참석했던 아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어린 시절에 바라본 어떤 빛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생 그 빛을 추구하며 산다. 그에 맞서 칼을 뽑았다는 건 전쟁이다. 무 한 조각 썰고 칼집에 넣는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할 수 있다. 또 한 번 패배이자 공식적인 수용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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