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한반도 운명 바꾸려…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다
정치는 돈이다. 정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독립운동은 순수한 정치 활동이지만, 망명정부 지도자는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짓누른 짐이었다.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서자,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에 뽑혔다. 그러나 상해의 정부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상해의 요인들은 대통령에게 상해로 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이 수락하자, 상해 사정을 잘 아는 측근들이 반대했다. 상해 방문 요청은 그를 공격하기 위한 함정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정 오려면, 몇 만원의 비자금이라도 갖고 오시오” 하고 조언했다. 여비 마련도 힘들었던 이승만은 “성력(誠力)으로 대신하겠다”고 회신했다.
1920년 말에 중국으로 밀항한 이승만은 자신의 순진함에 대한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 했다. 그가 큰 자금을 갖고 온다는 소문이 돈 터라, 그는 실망한 사람들의 냉대와 공격을 견뎌야 했다. 그들을 탓하기도 어려웠다.
“여러 청년들은 […] 무한한 기한(飢寒)과 고초를 당한 뒤에 특별한 희망을 가지고 상해로 오면 기한을 면할까 하여 와서 본즉, 또한 곤란이 막심하므로 절망하는 이가 많았소. 그런 정경을 보는 정부 당국자는 기한의 괴로움보다 마음고생이 더욱 심하였소이다.”
美국무부 인사들 마음 움직인 ‘편지’
상해에서 돌아온 뒤부터 이승만은 외교에 전념했다. 외교래야 조선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 정부와 상하원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국무부는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 대표에겐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중요한 사건이면,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면 백악관은 국무부에 이첩했고, 국무부는 마지못해 퉁명스러운 답장을 보내왔다.
반응은 시원치 않고 효과는 없는 편지들을 쓰는 일은 지치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런 노력은 차츰 성과를 얻어서, 국무부 관리들이 그를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그의 인품과 열정에 감복한 친구들이 그를 돕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은 통신사 INS의 기자였던 제이 제롬 윌리엄스였다. 1919년 4월에 이승만은 처음으로 윌리엄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미국 신문들은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에 눌려 3·1독립운동을 보도하지 못했다. 이승만이 자신을 소개하고 조선의 만세 시위가 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어진다는 내용의 전보 두 통을 꺼내 놓자, 윌리엄스는 바로 타자기를 꺼냈다. 다음 날 그의 기사가 많은 신문들에 실렸다. 그 뒤로 이승만은 전보들이 들어오면 윌리엄스를 찾았고, 조선의 시위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승만의 열정과 조선의 비극적 운명에 끌려, 윌리엄스는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서 조선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5년 2월 초순에 러시아 크리미아의 얄타에서 열린 미국, 영국 및 러시아의 정상회담(얄타 회담)에서 미국 대표단이 돌아온 뒤, 미국 저널리스트 에밀 고브로는 묘한 문서를 입수했다. 얄타 회담에서 세 강대국이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 궤도(orbit of influence) 안에 남도록 한다”고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고브로는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전리품으로 대하는 행태에 분개했다. 그래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써온 윌리엄스를 찾았다. 두 사람은 먼저 그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는 일에 나섰다. 고브로는 탐사보도 기자로 시작해서 타블로이드 편집자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다. 윌리엄스는 오랫동안 국제 정치를 추적해온 통신사 기자였다. 한 달 가까이 취재한 뒤, 두 사람은 그 문서가 진본이라고 판단했다.
그 문서를 본 이승만도 그들의 판단에 동의했다. 그리고 국제연합(UN) 창립총회가 열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얄타 협정에 조선에 관한 비밀협약이 있었음을 폭로했다. 그의 폭로가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신문들이 크게 보도했다. 그러자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활동하던 국제정치학자 정한경이 걱정했다. “박사님은 얄타 회담에 참여한 연합국 지도자들을 국제 사회에 고발한 셈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그러한 고발에 대해 그 사람의 얘기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이승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밝히기 위해 지금 그것을 터뜨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소.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 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것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오.”
한반도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비밀 거래로 결정되는 상황에서 발언권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얻으려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어 미국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는 고브로가 얻은 문서에서 그렇게 할 기회를 본 것이었다. 나아가서 그 기회를, 손으로 잡기 어려울 만큼 위험한 기회를, 머뭇거리지 않고 움켜쥔 것이었다. 그런 통찰과 행동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에게 퍼부어질 억측과 비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품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이승만의 위대함이었다.
마침 얄타 회담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던 참이어서, 이승만의 폭로는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 영국에서도 처칠이 의회에서 이승만의 폭로에 관해 해명해야 했다. 난처해진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의 폭로는 거짓 소문에 바탕을 두었으며,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된 연합국의 조선 정책은 충실히 이행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이 그리도 바라던 미국의 언질이 나온 것이었다.
이런 선언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에 상륙하기로 뒤늦게 결정했다. 그리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는 방안을 러시아군에 제안해서 동의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남한에 대한민국이 세워질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승만의 여러 업적들 가운데 아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당시 그는 꼭 70세였다. 그래도 그는 역사의 거센 물살 속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그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얄타 비밀 협약의 실상
1946년 2월에 얄타 협정의 ‘동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이 공개되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두세 달 안에,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약속했다. 러시아의 참전은 세 가지 조건들이 충족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①외몽골의 현상 유지 ②러일전쟁으로 제정 러시아가 잃은 권리들(남부 사할린, 대련항과 여순항의 사용권 및 만주의 철도 운영권)의 복원 ③쿠릴 열도의 러시아 할양이었다.
이승만의 주장대로, 얄타 협정엔 동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이 실제로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조선에 관한 항목은 거기 없었다. 이승만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적들은 그가 경솔했다고 몰아세웠다.
이 수수께끼를 풀 단서는 비밀 협약에 들어 있다. 스탈린은 러일전쟁으로 제정 러시아가 잃은 이권들을 되찾고자 했다. 그런 이권들 중 가장 큰 것은 조선에서의 우월적 지위였다. 그것에 비하면, 비밀 협약의 이권들은 부스러기들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방도를 강구했다고 보아야 한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라는 격언이 어울린다.
이런 상황은 얄타 비밀 협약 뒤에 또 하나의 비밀 협약이 있었다는 추론을 낳는다. 조선이 워낙 중요했으므로, 스탈린은 러시아에 호의적인 미국 대표와 비밀 합의를 보았다는 얘기다. 얄타 회담에서 러시아 첩자 앨저 히스가 실무를 총괄했다는 사실은 이런 추론을 떠받친다. 실제로, 얄타 일정이 끝나자,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 당국과 협의했다. 고브로의 문서는 거기서 이루어진 비밀 협약의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은 이 문서를 지니고 귀국했는데, 한국전쟁 초기에 공산군에 넘어갔다. 언젠가 모스크바의 비밀 문서 서고가 열리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긴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사건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숙적의 대결: 이승만과 앨저 히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얻도록 하려고 국무부를 찾았다. 그는 새로 동아시아 업무를 맡은 앨저 히스와 만나 대한민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을 도울 수 있다고 밝혔다.
히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익을 해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미국은 대한민국을 승인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승만은 그의 주장이 비논리적임을 지적했다. 말문이 막힌 히스는 같은 얘기만 되풀이했다. 이승만은 미국 관리가 러시아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해 뒤, 이승만은 조선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을 걱정하는 편지를 국무부에 보냈다. 히스는 조선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와의 협의를 거쳐야 풀리리라고 답신했다.
1945년 봄에 국제연합 창립총회가 열릴 때, 이승만은 대한민국도 참가하겠다고 신청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사무총장은 히스였다. 히스는 대한민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과 조건이 같은 나라들이 이미 참가했음을 지적했지만, 히스는 끝내 거부했다.
국제연합 가입 가능성이 사라지자, 이승만은 고브로가 주선한 기자 회견장에 나갔다. 그리고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사이에 비열한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것으로 한반도 전체를 러시아에 넘기려던 히스의 음모는 좌절되었다. 두 숙적의 운명적 대결에서 조선의 애국자가 미국의 매국노에게 깔끔하게 이긴 것이었다.
히스는 러시아군 정보기구 GRU의 통제를 받았다. 1948년 8월 하원 반미국행위위원회는 히스의 간첩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의 첩자로 활약했음이 드러났지만, 공소 시효가 지나서, 기소되지 않았다. 대신 범행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한 위증으로 5년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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