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키스 후폭풍… 스페인 ‘마초문화’ 도마 올랐다
지난 20일(현지 시각) 호주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은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1대0으로 격침하며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경기 후 시상식에서 불거진 루이스 루비알레스(46) 스페인축구협회장의 ‘강제 키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축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고, 스페인에 만연한 마초(남성우월) 문화를 성토하는 대규모 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무적함대’라 불리는 스페인 축구의 정점에 있던 루비알레스는 졸지에 ‘위기의 마초맨’이 됐다.
28일 수도 마드리드 중심가에 수백 명의 시위대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보라색 손팻말과 깃발을 들고 시위와 행진에 나섰다. 앞서 이번 월드컵 우승 주역 23명을 비롯해 81명의 선수가 루비알레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스페인 여자 대표팀에서 경기하지 않겠다고 서명했다. 여자 대표팀 코치진과 다른 연령별 대표팀 코치 6명도 동반 사퇴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FIFA도 루비알레스에게 90일의 직무정지 징계를 내렸다. 스페인 검찰은 루비알레스의 행위가 성범죄에 해당하는지 예비 조사에 들어갔고, 유엔도 스테판 두자릭 대변인이 “스포츠계에 여성에 대한 심각한 성차별주의가 남아 있다”는 성명을 냈다. 코너에 몰린 루비알레스는 그러나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가짜 페미니스트들이 나를 죽이려는 것”이라며 사퇴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29일 현재까지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CNN은 “스페인이 역사적인 우승을 거둔 뒤 일주일이 넘었지만 축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며 “오히려 최근 몇 년간 평등권이 크게 향상됐음에도 원치 않는 키스로 인해 전 세계의 분노를 일으키는 스페인의 고질적인 마초 문화가 다시 주목받게 됐다”고 했다.
해외 언론들이 ‘원치 않는 키스’ ‘키스 게이트’로도 지칭하는 이 사건은 전 세계 시청자들이 TV로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졌다. 20일 결승전이 끝난 뒤 루비알레스는 우승한 선수들을 축하하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 1순위 레오노르 공주 등과 시상대에 올랐다. 루비알레스는 자신의 앞으로 온 공격수 헤니페르 에르모소(33)를 양팔로 힘껏 껴안은 후 두 손으로 에르모소의 머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이 장면은 TV 화면에 고스란히 포착됐고, 이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면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루비알레스는 이틀 뒤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최고로 흥분되는 순간에 악의 없이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해당 행동이 “사전에 합의된 것”이라고 했다. 사과인 듯 사과 아닌 듯 자기변명에 급급한 모습으로 비치면서 그를 향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여기에 ‘강제 키스’를 당한 에르모소가 “(루비알레스의) 당시 행위를 정당화하는 발표를 하라는 지속적인 압력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고 폭로하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다.
이번 사태는 스페인에 뿌리 깊게 잔존해 있는 마초 문화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스페인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성 평등의 제도화가 가장 더딘 국가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1990년대부터는 가정 폭력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의 마초 문화가 독재자 프랑코의 철권통치기(1939~1975년) 시행했던 권위적인 여성 정책의 잔재라는 시각도 있다. 스페인은 20세기 초반까지 양성평등정책이 모범적으로 시행되는 나라로 꼽혔지만, 프랑코 집권기에는 가정적·순종적 여성상을 강조하며, 간통죄를 여성에게 차별 적용한다거나, 여성의 재산권과 참정권을 제한하는 등의 억압적 정책을 시행했다.
스페인은 마초 문화를 척결하기 위해 2007년 ‘실질적 남녀 평등을 위한 국왕령’을 공포했고, 2018년에는 가정폭력범 처벌을 강화하는 법률도 제정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이 꾸준히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계를 중심으로 남성 중심의 권위적·폭력적 문화가 여전하다는 인식이 남아있었고, ‘강제 키스’는 곪았던 갈등이 터지는 기폭제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월드컵 전에도 스페인 여자 축구 대표팀은 남자팀에 비해 급여가 낮다며 시위를 벌였고, 일부 선수들은 더 나은 장비, 훈련 시설, 처우를 요구하며 합류를 거부했다. 대표팀을 이끈 호르헤 빌다 감독은 선수 관리 명목으로 소지품을 임의대로 뒤지는 등 지나치게 권위적인 지도 방식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번 파문이 스페인의 성 평등 풍토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마드리드자치대학교의 마리암 마르티네스 바스쿠냥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이번 사건은 스페인의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이 가장 남성 중심적인 기관에서도 성차별을 드러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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