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말고 가, 남은 우리가 반드시 우승할 테니”

창녕/이영빈 기자 2023. 8. 30.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등포공고 고교축구선수권 정상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감독님, 전 안 갑니다.”

비, 땀, 눈물 섞인 우승 - 29일 창녕스포츠파크에서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정상에 오른 영등포공고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3학년 중앙 수비수 이예찬을 포르투갈 리그로 보내고 난 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욱 똘똘 뭉쳐 값진 우승을 일궈냈다. /김동환 기자

지난 25일 영등포공고가 8강전에서 이겼는데도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정신적 지주인 3학년 중앙 수비수 이예찬이 포르투갈 프리메라리가(1부 리그) 포르티모넨세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메디컬 테스트를 위해 그다음 날 출국해야 했다. 이예찬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유럽 진출의 기회였다. 그런데도 이예찬은 “이번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고 떠나겠다”고 김재웅 영등포공고 감독에게 말했다.

이에 주장 김태원(3학년)을 비롯한 선수들이 말했다. “반드시 우승한다고 약속하겠다. 우리를 믿고 너는 유럽으로 가라.” 밤새 갑론을박한 끝에 이예찬은 다음 날 포르투갈행 비행기를 탔다. 김재웅 감독은 “그날 밤 선수들끼리 울면서 난리가 났다”고 했다. U-17(17세 이하) 대표팀 소집 등으로 이예찬처럼 대회를 못 뛰게 된 영등포공고 선수가 4명이었다. 그때마다 선수들은 우승을 약속하며 그들을 보내줬다.

그리고 결승전이 열렸던 29일 오후 5시 경남 창녕군 창녕스포츠파크는 장대비가 막 그쳐 덥고 습했다. 곳곳엔 물웅덩이가 널려 있었다. 대회 동안 이틀에 한 경기꼴로 뛰었던 양 팀 체력도 온전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후반에는 그쳤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경기 대신 필사적인 태클과 몸싸움이 뒤엉켰다. 선수들끼리 얼굴을 맞대는 신경전도 수시로 벌어졌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었다.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쏟아지던 거센 비를 뚫고 먼저 골을 넣은 건 영등포공고였다. 후반 21분 손승민(3학년)이 오른쪽에서 깊게 찬 코너킥을 수비수 선예준(3학년)이 높이 솟아올라 머리로 골문에 꽂아 넣었다. 선예준은 큰 키(185cm)를 활용해 신평고 수비와 골키퍼까지 제압하고 골을 넣었다. 소중한 선제골을 넣었는데도 영등포공고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신평고가 수비 진영에서 공을 잡으면 영등포공고는 일제히 압박했다. 경기는 그대로 영등포공고의 1대0 승리로 끝났다. 영등포공고 선수들은 해맑게 웃으면서 그라운드 곳곳을 뛰어다녔다. 김재웅 감독은 “선수들이 약속을 지키겠다며 몸이 바스러지게 뛰었다. 감동적인 경기였다”고 했다.

영등포공고가 29일 제78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겸 2023 전국고등축구리그 왕중왕전(조선일보·대한축구협회·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공동 주최)에서 우승했다. 영등포공고가 이 대회 정상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1958년 창단한 전통 명문 영등포공고 축구부는 고교 축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체계적인 전방 압박으로 올해 최강팀 중 하나로 꼽힌다. 백운기(2월), 대통령금배(7월)에 이어 최고 권위인 고교선수권까지 제패하며 3관왕에 올랐다. 이번 대회 최우수선수는 이날 결승골을 터트린 선예준이 선정됐다.

영등포공고 주장 완장은 김태원이 찼지만, 모든 선수가 자신이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뛴다고 한다. 그래서 훈련 때도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어떻게 더 좋은 경기를 할지 고민한다. 실전에서도 희생과 헌신을 가장 중요시한다. 김재웅 감독은 “영등포공고를 17년째 이끌고 있는데 이렇게 끈끈한 팀은 처음”이라며 “응집력 덕분에 가능한 우승이었다”고 했다. 신평고는 영등포공고에 비해 강한 전력으로 평가받았지만, 경기 내내 제대로 된 슈팅을 시도하지 못하다가 선제골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4강전에서 2골을 넣었던 정마호(3학년)가 침묵한 게 아쉬웠다.

2016년(보인고-경희고) 이후 7년 만에 비(非)유스팀이 맞붙는 결승이었다. 그동안 고교 축구에선 체계적인 프로구단 관리를 받는 유스팀 선전이 두드러졌다. 2017년부터 순서대로 수원매탄고(수원 삼성), 울산현대고(울산 현대), 포항제철고(포항 스틸러스), 광주금호고(광주FC), 전주영생고(전북 현대)가 정상에 올랐다. 그러다 작년 평택진위FC가 챔피언을 차지했고, 올해는 영등포공고가 우승하며 2년 연속 비유스팀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