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경축사, 문재인 대통령이 독도 이야기 넣자 했다

한겨레21 2023. 8. 30.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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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독서]문재인·노무현이 오랜 시간 공유해온 언어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
문 대통령의 시선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인생에 가 있었다
충청남도 교육청 평생교육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며 글을 익힌 78살의 주미자 할머니가 2019년 여름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신동호 제공

바둑알이 둥근 것은 움직이는 하늘이다. - 김성동, 〈 국수 ( 國手 ) 4 〉. ‘궁궁을을’

“김경수 경남지사 사면복권하겠지요?” 가까운 기자들이 물었다. 2022 년 봄, 문재인 정부의 마무리 무렵이었다. 그동안의 관례에 따라 사면권이라는 대통령이 가진 특별한 권력을 사용하리라는 예상이었다. “ 안 하실 거 같은데 …”. 나는 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 “ 아니 다른 분들은 다 할 거라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 뜻밖이라는 듯 물어왔다. 촛불 때문이라고, 김경수 지사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로 들리겠다 싶어 나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삼켰다.

변화는 늘 반혁명에 가로막힌다

대통령의 마음과 결정 과정을 알기란 쉽지 않다. 단지 일상의 행동으로 유추해 짐작할 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특권에 반대했다. 대통령이라는 직위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맡게 된 역할 분담이라 여겼다. 촛불혁명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했다. 개인은 성숙해졌고 모든 삶은 자기 가치를 가지며 어울려 협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됐다. 정치인이라고, 선출된 권력이라고 유별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기관 개혁은 그렇게 시작됐다. 특권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했다. 당연히 대통령 스스로 특권에서부터 멀어져야 했다.

물론 관성을 깨기란 어렵다. 권력은 소수에게 독점됐을 때 더 힘이 세진다. 소수에게 있어야 권력에 가까워질수록 얻을 것이 많고 폼도 난다. 대통령 주변이라고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그토록 권력을 국민과 공평하게 사용하려 했지만 권력을 이전과 같이 누린 이들도 있었다. 문 전 대통령이 제일 잘못한 일은 주변 사람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느냐, 하는 말을 한다. 반대로 보면 모두 특권이 내미는 손짓에 유혹된 것 같다. 오랫동안 권력을 추구해왔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하기야 1789 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40 여 년이 지난 루이 필리프 치세에 비로소 개인이 역사에 등장한다고, 발터 벤야민은 〈 아케이드 프로젝트 〉 에 썼다. 시대의 변화란 늘 반혁명에 가로막히면서 우여곡절 끝에 온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지음, 새물결 펴냄, 2005년

얼마 뒤 후배 몇과 창원교도소에서 김경수 전 지사를 면회했다. 섭섭하지 않으시냐 물었더니, 애초에 만기까지 채울 작정이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기대가 없었을까. 그러나 김 전 지사 역시 특권을 원치 않았음이 분명하다. 특권으로 복권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본인의 앞길을 더 분명하게 밝혀줄 까닭이다. 여전히 권력은 저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물꼬는 터졌다. 권력은 국민을 위한 행정제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협력과 나눔에도 있다. 특권의 유혹을 뿌리친 대통령들이 있었고, 많은 국민은 이제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다.

굳은살처럼 심장에 박였을 언어

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명한 장충단공원 연설에서 ‘ 특권 ’ 이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김 전 대통령은 몇 사람만 잘 살게 하는 특권경제를 끝내겠다고 했다. ‘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 ’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매특허였다. 서민의 눈높이로 내려온 대통령으로 새 시대를 열었다.

어느 날 연설문 수정본에서 ‘ 반칙과 특권 ’ 이라는 두 단어를 만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연필로 꼭꼭 눌러쓴 것이다. 왜 전직 대통령의 특허상품을 가져다 쓰실까, 생각하다가 2018 년 삼일 절 연설문을 작성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통령은 나를 불러 독도 이야기를 넣자 했고, 그 자리에서 죽 불러주는 걸 받아 적었다. 사무실로 내려와 살펴보니 노 전 대통령의 널리 알려진 독도 연설과 매우 유사했다. 연설비서관이 노 전 대통령 연설을 베꼈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옹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퇴근길 버스 안에서 무릎을 쳤다. 일부러 외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직접 관여했거나 함께 작성한 것이 아니라면 저리 똑같이 불러줄 수 없다, 적어도 두 분의 공통된 철학이었음이 분명했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 도 그렇다. 두 분이 오랜 시간 수시로 공유한 언어였으리라 . 물론 두 분과 함께했던 김 전 지사에게도 굳은살처럼 심장에 박였을 언어였다.

여름휴가철에 대통령들이 읽은 책들에 주목해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혜를 키운다. 과거의 스승과 만나고( 〈 맹자 〉 〈 배는 그만두고 뗏목을 타지 〉 ), 미래를 구상한다( 〈 지식자본주의 혁명 〉 〈 미래와의 대화 〉 ).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격적이다. 과학으로 갔다가( 〈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 ) 위기 돌파의 지도력으로 옮겨간다( 〈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 ).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가 눈에 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02년

일반적으로 사회갈등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범위는 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표현할 수 있다 . 그러나 매우 협애한 이념적 범위를 갖고 있는 한국 정당체제의 경우 좌우의 스펙트럼 위에서 정당 간 차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이때 남는 것은 지역감정의 정치뿐이다 . ( … ) 한국에서 지역감정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지역 간 차이나 대립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 사회의 중요한 균열 요소들이 이슈화되거나 정책의 쟁점으로 부각될 수 없는 조건 , 냉전반공주의의 강한 영향력 때문에 정당체제로 대표되는 이념적 범위가 지극히 협애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문제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 - 최장집 ,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 ‘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과제 ’

노 전 대통령 당선 자체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요구였다 . 무명의 시민들이 선두에 섰다 . 정치권 , 권력기구들이 크게 요동쳤다 . 노 전 대통령 역시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 정치 지형 변화에 대한 고민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책 속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

<국수 4> 김성동 지음, 솔출판사 펴냄, 2018년

민서는 제각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평범한 사람들이 엮어낸 역사를 마주한다. 2018 년 여름에는 김성동 선생의 대하소설 <국수> ( 國手 ) 를 읽었다. 제목이 시사하듯 바둑의 최고수를 소재로 삼지만, 전체 이야기는 600 년 종묘사직을 지켜온 조선왕조의 황혼 무렵을 배경으로 의술·그림· 소리와 같이 우리 것을 솜씨 있게 이어온 사람들을 엮어낸다. 무엇보다 고유한 우리말을 되살려낸 역작이며, 그저 살려낸 것이 아니라 계급과 지역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언어를 아름다운 옛말로 보여줌으로써 그 말을 쓰며 살았던 장삼이사의 삶을 고스란히 부활시켰다. 바둑알 하나하나 그 자체로 같은 크기의 민서 ( 民庶 , 민초의 고유말 ) 이면서, 둥근 하늘이면서, 바둑판 위에서 제각기 자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대통령은 확인했을 것이다. “ 낮뒤가 훨씬 지난 산길은 고즈넉하기만 한데 ”라는 문장에서 ‘ 낮뒤 ’라는 단어에 단 각주( 하오 下午 . ‘ 오후 午後 ’ 는 왜말임 )를 보고 나도 모르게 목이 뜨거워졌다 . 지금까지 ‘오후’ 를 순우리말로 여기고 대충 서민의 삶을 잘 안다고 자만했던 것이다.

소설, 특히 장편 대하소설 속 인물들에서 우리는 한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다른 문화권의 소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감명 깊게 받아들이고 이를 소개했을 것이다(< 벨벳은 밤이었다> < 낙원으로> 등 ). 문 전 대통령의 시선도 평범하지만 소중한 인생에 가 있다. 2019 년 여름, 할머니들이 쓴 요리책을 읽고 직접 SNS 에 글을 올렸다.

‘51 명의 충청도 할매들 ’ 이 음식 한 가지씩 한평생의 손맛을 소개한 요리책을 냈습니다. 〈 요리는 감이여 〉라는 책을 낸 51 명의 할머니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 글을 모르고 사시다가, 충청남도 교육청 평생교육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며 글을 익히게 된 분들입니다  78 세의 주미자 할머니와 81 세의 이묘순 할머니는 뒤늦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사연을 연필로 쓴 편지로 보내오셨는데, 글씨도 반듯하게 잘 쓰시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정확하고, 중학교 · 고등학교까지 계속하겠다는 향학열을 보여주셔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특별한 요리가 아니라 김치와 장아찌, 국, 찌개와 반찬, 식혜 같은 간식 등 어릴 때 어머니 손맛으로 맛있게 먹었던 일상 음식을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직접 쓴 레시피를 붙여 소개한 책이어서 재미도 있고, 실용적인 도움도 될 듯합니다. 책을 낸 ‘창비교육’에서 8월 22일 졸업식과 함께 조촐한 출간기념회를 한다고 하니, 마음으로 축하하고 격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문재인, ‘요리는 감이여’, 2019년 8월 12일

반칙 대신 흙이 검게 끼어 있는 삶

글을 모르고 사시다가, 라는 이 짧은 문장에 우리의 슬픈 역사가 구구절절 담겨 있다. 반칙이라고는 손톱 끝에라도 남겨두지 않고 대신 흙이 검게 끼어 있는 삶이었다. 특권이라고는 늦가을 된서리를 먼저 마주치는 것 말고는 당최 누려보지 못한 삶이었다. 할머니들에게 진정으로 애정이 있다면 정권을 잡았다고 권력을 함부로 자기들끼리 남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지 말자고 촛불을 들었다. 그러지 말자고 뜻을 모아놓고선 그새 권력을 제대로 못 썼다고 그리 할 말은 아니다.

권력의 맛을 알고, 특권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있으니 세상이 순조롭게 바뀌긴 어렵다. 전임 대통령은 ‘감자 캐기’로 지독히 평범해지고 특권을 내려놓는 일이 그의 일관된 의지이지만, 특권은 내편 네편을 가리지 않으니 양산은 몸살을 앓는다. 대통령 가까이에서 일해보았다는 것도 무슨 특권 같아서, 혼자 괜히 몸을 사린다. 내년 여름쯤 정치의 계절이 지나서야 대통령을 찾아뵙고, 예의도 못 차린다는 지청구에서 벗어날지 싶다. 특권의 미몽에 빠져도 자기만은 잘 할 것 같지만, 그게 반칙이다. 큰 그늘에서 슬쩍 나와 뙤약볕을 달려볼 것이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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