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논점/길진균]직설-감성 연설, 선택은 대통령이
戰時에도 대통령 곁엔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말-생각 글로 구현
평소 어투 표현 농담까지 고려… 讀會 방식 대통령마다 제각각
의견 듣지만 대통령이 최종 완성… 尹 ‘자유’ 취임사 대부분 직접 써
대통령 연설문에는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다. 국정의 이정표이고 곧 역사다. 대통령부터 각 수석, 비서관, 행정관 등 대통령실이 역량을 총결집하는 이유다. 연설기록비서관이 초안을 잡는다지만 연설문 작성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뜻을 대통령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의 논리 전개 방식과 고유의 표현 방식, 어투, 즐겨 쓰는 용어와 농담까지 염두에 두고 연설문을 작성한다. 김대중 노무현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했던 강원국 작가는 “김 대통령의 연설문은 호남 출신 행정관이, 노 대통령의 연설문은 부산 출신 행정관이 어투까지 흉내 내면서 몇 번씩 읽어보며 독회(讀會)를 했다”고 했다. 길게는 수개월에 걸쳐 한 자 한 자 고쳐지고 다듬어지는 대통령 연설문은 누가 쓰고, 어떻게 완성되는지 살펴봤다.》
● ‘대통령의 그림자’ 연설비서관
서울 관악구 남태령 언덕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 지하에는 전시지휘소 벙커(B1 문서고)가 있다. 또 경기 성남 지하엔 한미연합사가 관리하는 ‘CP 탱고’라는 전시지휘소가 있다. 여기엔 모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바로 옆자리 지정석의 주인공은 연설비서관이다. 전쟁 중 대통령의 메시지를 즉각 군과 국민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드러나지 않게 대통령을 밀착 보좌하는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의 말과 메시지를 책임진다. 용산 대통령실에선 김동조 비서관이 대선 후보 때부터 그 일을 맡아 왔다. 금융·투자 전문가로는 이례적 발탁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온라인상에서 정치·사회 현안 비평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글 잘 쓰는’ 연설비서관이라고 혼자 쓸 수는 없다. 정치 경제 사회 안보 수석실에서 분야별 초안을 올리면 연설비서관이 취합한다. 올 초 한일 관계 개선이나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처럼 민감한 비공개 안보 구상이 진행될 때는 대통령실(청와대) 내 국가안보실이 초안을 작성하기도 한다. 윤 대통령 취임 후 안보 관련 부분은 교수 출신인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이 쓴다고 전해진다.
대통령의 의중이 중요하기에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의 사담(私談)까지 메모해야 하고, 간간이 들리는 에피소드도 귀를 세우고 들어야 한다. 연설문을 준비하면서 대통령의 생각을 직접 묻고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간 큰’ 참모이기도 하다.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 중 다른 수석실이나 정부 부처에서 알아야 할 것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도 한다. 청와대 출신 한 인사는 “연설비서관은 비서관(1급) 직급이지만 대통령의 생각과 심기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서관 이상’의 역할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 최종 독회 방식도 제각각
대통령 취임사나 8·15 경축사처럼 중요 연설은 길게는 몇 달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따로 TF팀을 꾸리기도 한다. TF는 정부 부처에서 보고를 받고, 교수 변호사 등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원고를 작성한다. 대통령이 직접 대통령실 밖 외부 전문가에게 연설문 원고를 통째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외부 전문가와 대통령실 참모들이 만든 결과물 여러 판본을 놓고 메시지와 문장력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참모들의 손을 거친 초안은 독회를 반복해 가며 최종 확정된다. 일종의 집단지성을 모으는 과정이다. 독회 방식은 역대 대통령마다 스타일이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 등 중요 연설에 국한해 독회를 가동했다. 참석자도 비서관급 이상으로 제한했다. 참석자들은 의견을 냈고, 김 대통령은 일단 듣기만 했다. 그런 다음 대통령이 연설비서관의 초안을 원고 여백에 깨알 같은 정자체로 빽빽하게 써가며 고쳤다. 검은색 볼펜으로 쓰다가 빨간색 볼펜으로 덧쓰기도 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아 ‘빨간 펜 선생님’ 같았다는 것이 참모들 기억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회는 토론 방식이었다. 업무가 연관된 행정관까지 다 불렀다. 대통령은 토론을 주도하며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당시 한 참모는 “100% 구술이었다. 대통령이 머릿속 생각을 말로 불러줬고, 우리는 돌아와 글로 풀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회를 통한 연설문 업그레이드를 선호했다. 여러 곳에서 연설문 초안을 받았고, 청와대 밖 외부 전문가까지 초청해 함께 읽으며 글을 고쳤다. 독회가 20번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했다. 일단 참모들의 얘기를 들어본 뒤 본인의 생각과 주관을 초안의 여백에 펜으로 꼼꼼하게 적었다. 문 대통령은 연설비서관을 수시로 불러 의견을 나누곤 했다.
● ‘레토릭 배제’ 尹 스타일
윤 대통령은 본인 생각을 참모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연설문 작성을 시작한다. 독회는 소수로 진행하는 것을 선호한다. 중요 연설문의 경우 연설비서관이 초안을 만들면 비서실장, 수석 등과 2, 3차례 상의를 한 뒤 자신이 직접 원고를 쓰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5월 취임사 역시 취임사준비위원회가 약 20명의 전문가 의견을 종합한 버전과 함께 외부 전문가의 글 2, 3가지를 견줘본 뒤 대통령이 최종 정리한 것으로 파악된다. 윤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평소 생각하던 ‘자유의 정신’을 강조하기로 결심했고 본인이 상당 부분 직접 원고를 다시 쓴 것으로 이 과정을 아는 관계자가 설명했다.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자유”라는 표현처럼 16분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35번 썼다. 윤 대통령은 올 8·15 경축사에서도 ‘자유’를 27번 언급했다.
윤 대통령 연설의 특징은 레토릭(수사·修辭)의 배제다. 연설의 대부분이 직설적이다. 비유적이나 감정이 담긴 시적인 표현, 사자성어 등이 거의 없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말한 8·15 경축사도 마찬가지다.
미사여구가 없어 연설이 짧다는 점도 특징이다. 현안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방식도 선호하지 않는다. 초안에서 삭제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연설문 여백에 직접 펜으로 써서 지시한다. 대통령이 직접 비유와 예시 문장과 단락을 펜으로 죽죽 지워 나가면서 연설문이 과거 대통령보다 짧아졌다.
과거 정부에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업무를 맡았던 한 인사는 대통령의 메모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이 연설하면 이튿날 조간신문들은 초고에 있던 부분보다 대통령이 직접 메모하거나 고친 부분을 제목으로 뽑는 일이 많았다.” 대통령 본인이 추가한 곳에서 ‘연설자의 진심’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이런 연설 방식 때문에 “감동이 부족하다”거나 “공격적인 직설화법이 대통령의 언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검사 생활을 27년 한 윤 대통령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에 더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언어로 핵심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때로는 감성의 언어로 국민의 마음을 보듬고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 “연설은 정치, 자신의 언어가 중요”
전임 문 대통령은 반대로 감성을 자극하는 표현을 자주 담았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는 취임사가 대표적이다. 일본과 다툴 땐 “이제 누구도 대한민국을 흔들 수 없습니다. 이제 누구도 국민 주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라며 운율과 함께 감성에 호소하는 표현을 연설문에 담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화려한 문장이 늘 감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지지자들에게는 갈채를 받았지만 “소통이 아닌 쇼통”이라는 비판도 공존했다.
정치는 말이고, 대통령의 연설은 통치행위의 한 부분이다. 대통령마다 자신의 색깔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주관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국민에게 전달하는 게 대통령의 연설이다.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는 대통령이 선택할 몫이다. 관건은 국민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다. 건조하고 때로 거칠지만 메시지는 분명한 윤 대통령의 연설 스타일에 대한 국민들의 호불호도 분명히 갈리고 있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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