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상훈]100년간 치유되지 못한 대학살 트라우마

이상훈 도쿄 특파원 2023. 8. 2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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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총에 맞아 숨진 지난해 7월 일본 후쿠오카 한국총영사관은 안내문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국내에서는 "아베 사망과 한국인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의문이, 일본에서는 "근거 없이 일본인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는 반발이 나왔다.

당시 일본 SNS에는 "용의자 국적을 밝히라"며 재일 한국인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글이 올라왔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어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이에 대한 책임 인정 및 사과 요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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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재해-범죄 발생 시 혐한 유언비어 여전해
간토대학살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 택해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총에 맞아 숨진 지난해 7월 일본 후쿠오카 한국총영사관은 안내문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우리 국민 대상 혐오범죄 가능성이 제기됐다”며 위험 지역에 접근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국내에서는 “아베 사망과 한국인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의문이, 일본에서는 “근거 없이 일본인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는 반발이 나왔다. 안내문은 삭제됐다.

자위대 출신 일본인이 범인으로 밝혀지며 논란은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 소동은 재일동포 사회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일본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언제 어디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당시 일본 SNS에는 “용의자 국적을 밝히라”며 재일 한국인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글이 올라왔다.

1923년 9월 1일 도쿄 등을 강타한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에 일본 군경과 민간 자경단은 식민지 백성이던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간토대학살을 나치 홀로코스트만큼 끔찍한 제노사이드(인종 말살)로까지 평가하는 시각이 역사학계에 적지 않다.

100년 전 역사로 묻어 버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 특히 재일동포에 대한 악성 루머는 계속된다. 2021년 2월 미야기현 앞바다에 규모 7.3 지진이 발생했을 때 SNS에는 ‘조선인이 후쿠시마 우물에 독을 넣고 있는 것을 봤다’는 글이 올랐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때도 비슷한 유언비어가 SNS에 퍼졌다. 2019년 교토 애니메이션(교애니) 건물 방화로 수십 명이 숨지자 일본 포털 사이트에는 “방화는 한국인 습성” “재일 한국인이 웃고 있다” 같은 혐한(嫌韓) 댓글이 번졌다.

일본에서 자연재해나 심각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혐한 유언비어가 발생하는 것은 묵과하기 어렵다. 인터넷 시대라 유언비어가 퍼지는 속도만큼 사실이 밝혀지는 속도가 빠른 게 그나마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인터넷 유언비어 유포를 일본 정부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는 ‘공기(空氣)’라는 게 있다. 한번 형성된 분위기는 많은 사람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휩쓸린다. 한일 관계가 나빴던 최근 10여 년간 일본 정부와 정치권이 조성한 혐한 공기는 재일 한국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2017년 아베 전 총리 시절 일본 정부 홈페이지에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기술한 보고서가 슬그머니 사라진 일이 대표적이다. 이를 비판하는 보도가 잇달아 보고서는 복구됐지만 이는 일본 사회에 ‘간토대학살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해 9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는 1967년 이후 모든 도쿄도지사가 한 조선인 학살 추도사 보내기를 중단했다.

보수적이고 움직임 느린 일본 사회에서 한번 틀어진 발걸음은 웬만해서 바로잡히지 않는다. 한일 관계가 개선됐다지만 일본에서 당시 학살을 반성하자는 목소리는 일부 언론과 양심 있는 시민단체 정도 말고는 찾기 어렵다.

간토대학살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 징용과 성격이 다르다. 양국 간 첨예한 외교 사안도 아니고 한일 청구권 협정과도 관련이 없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어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이에 대한 책임 인정 및 사과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간토대학살을 대하는 일본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는 일본의 역사 인식을 보여줄 바로미터다. 역사 사실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모르쇠로 일관할지, 진정성 있는 사과로 역사와 화해할지 일본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단,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일본이 오롯이 짊어지게 될 것이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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