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문학의 거장…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만나다
우수한 성적 불구 서울대 독문과 진학
단편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 공모 등단
돈과 권력 아닌 ‘문학적 지배의 길’ 선택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축제’ 대표작
영화로도 제작된 ‘서편제’ 큰 사랑받아
그해 가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군 집과 땅, 재산을 모조리 탕진한 둘째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제 형제 가운데 살아 있는 유일한 남자로서 가족의 부양을 책임져야 했다.
당장 둘째 형의 장례비용부터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재직 중이던 잡지사 사정이 어려워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형편이었다. 대학 동창이던 소설가 박태순에게 들어온 원고청탁을 넘겨받아서 작품을 썼다.
이청준은 왜 문학의 숲,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작가로서 주요한 변곡점은 무엇이었고, 작품 세계는 어떠했을까. 신간 ‘이청준 평전’을 중심으로 작가 이청준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그가 쓰는 세계로 들어온 것은 중학 시절부터였다. 광주서중 2학년생 이청준은 교지에 콩트 ‘시험 날’을 실었다. 콩트는 병남이라는 학생이 시험 보는 날 부정행위를 하려고 온갖 준비를 했지만 실패하고 자성한다는 내용. 이듬해 다시 교지에 전남방직을 탐방한 기사와 함께 짧은 소설 ‘눈과 그 소녀’를 실었다.
명문 광주일고에서 전체 수석을 다툴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지만, 지방 수재들이 흔히 가는 법대가 아닌 서울대 독문과로 진학했다. 그것은 출세의 길이 아닌 ‘문학의 길’이었다. 그는 간절히 돈과 권력을 원했지만, ‘지배’와 ‘복수’라는 관점에서 ‘문학적 지배의 길’을 택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여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축제’, ‘신화의 시대’ 등을,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조율사’, ‘이어도’, ‘눈길’, ‘서편제’,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 17편의 장편소설과 155편의 중단편 소설, 1편의 희곡을 창작했다.
많은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석화촌’, ‘이어도’,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이 잇따라 영화로 제작됐고, ’서편제’와 ‘벌레이야기’도 각각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으로 제작돼 큰 사랑을 받았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이청준은 시대와 역사 현장에서 행동하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시대와 역사에서 한 발짝 비껴서서 바라봤다고 할까.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당연히 가져야 하지만, 그럼에도 문학적 성취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칫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해서 시대와 현장에만 매몰되고 문학적 성취를 놓치면 ‘알리바이 문학’에 그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청준은 1966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사상계’에 입사했고, 이듬해 ’여원’사로 이직했으며, 1971년에는 ‘월간 지성’ 창간에 참여했다. 1999년 순천대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를 지냈다. 2008년 7월 삼성서울병원에서 6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죽기 두 달 전, 그는 자꾸 사람이 겹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이윤옥은 전했다.
“사람의 숫자가 자꾸 헷갈려요.”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과 기억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동시에 봤다. 앞모습과 뒷모습이 다른 사람들도. “요새는 사람들 뒷모습만 보여요. 속까지 훤히 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했던 시인, 수십 년간 친교를 이어온 평론가, 평소 형으로 부르며 살갑게 굴던 후배 소설가….
평전에는 이청준의 주요 변곡점이나 현대사의 주요 사건, 이것들이 작품에 미친 영향 등이 촘촘하게 담겨 있다. 소설가 김승옥과 평론가 김현 등 유명한 작가들의 모습이나 이들과의 관계도. 길고 치열한 숙고와 결론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해 버리는 김승옥, 문학적 논쟁을 자주 벌인 김현, 삶과 처신이 깔끔해 ‘학’ 같은 황순원, 다양한 사람과 어울렸던 김동리….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는 결혼 전에 ‘여원’ 직원들과 함께 충무로 대원호텔에 가서 가불받은 월급을 탕진할 정도로 파친코에 몰입하기도 했고, 결혼해 생활이 안정되자 컴퓨터를 통해 주식 투자를 하고 주위에도 투자를 권장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하루 일과.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읽고 간단히 밥을 먹은 뒤 서재로 들어가 주식창과 씨름하다 나와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가 소설을 썼다. 저녁에는 책을 읽고 늘 술을 마셨다. 그는 주로 집에서 술을 마셨지만 약속이 있는 날에는 밖에서 마셨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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