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대한민국 보건의료정책의 ‘슈퍼 갑’ 거부권자
정부는 좀체 의사를 늘리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보건의료정책 과정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보건의료 현장 상황은 의료체계의 위기란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진보, 보수 그 어떤 정부도 그 해결책을 현실화하지 못했고,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무능과 무책임을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마법의 이익집단’이 있다. 바로 대한의사협회(의협)다.
한국은 의료선진국인가? 정부 당국자와 의사 등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답한다. 의료진, 의료시설과 서비스, 각종 건강지표 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왔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의료선진국에서 왜 후진국형 사고가 끊이지 않는가? 응급환자가 병상 또는 진료할 의사가 없어서 이곳저곳 떠돌다 숨지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혹 늦은 밤이나 새벽시간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는 재난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소아응급실이 없어서, 진료할 의사가 없어서 두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사연들이 심심찮게 언론 등에 보도되곤 한다.
사실 대한민국이 의료후진국에서 벗어난 건 오래전이다. ‘빅5’ 병원의 의료기술과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동네 병·의원에서도 누구나 쉽게 외래진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진료 대란이 반복되는 나라를 어떻게 의료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진료 대란의 원인은 명확하다. “응급실 뺑뺑이는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하고, 병원이 응급환자에게 입원실, 중환자실, 수술할 의사를 내주지 않기 때문이며, 소아진료 대란은 밤에 당직하면서 응급환자와 입원환자를 살피는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몇년째 충원되지 않기 때문”(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이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 주된 요인은 ‘의사 부족’이다. 의대 증원은 지난 2006년 이후 17년째 3058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응급실 전문의 등 의사 수를 늘리면 되지 않겠는가? 정부는 일찍이 비수도권 의료공백과 소아청소년과·응급의료과 등 일부 진료과의 전공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의대 증원을 추진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35년엔 국내 의사 수가 최대 2만7232명 부족할 것이란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렇듯 답은 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실제 진척된 건 없다. 정부는 좀체 의사를 늘리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보건의료정책 과정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보건의료 현장 상황은 의료체계의 위기란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진보, 보수 그 어떤 정부도 해결책을 현실화하지 못했고,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무능과 무책임을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마법의 이익집단’이 있다. 바로 대한의사협회(의협)다.
지난 2020년 7월 문재인 정부는 10년간 의대생 4000명을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의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의사단체들이 집단휴진을 벌이며 반대에 나서자 결국 정책을 철회했다. 의협은 이 집단행동으로 ‘9·4 의정합의’란 전리품까지 챙겼다.
그 핵심 내용은 “의협과 보건복지부가 동수로 참여하는” 의대 증원 확대와 비대면진료 등을 논의할 ‘의정협의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외 제3자는 일체 참여할 수 없다”는 단서도 포함됐다. 그런데 의대 증원이나 비대면진료가 어찌 정부와 의사단체, 두 당사자만이 결정할 사안인가? 더욱이 의협은 숱한 객관적 지표들을 외면한 채 의사는 부족하지 않고 앞으로 인구가 줄어드니 늘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해오지 않았는가?
윤석열 정부는 올 1월 말 의협과 ‘의료현안협의체’를 꾸려 의사 증원 등 의료현안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다. 지난 의정합의 연장선으로 2021년 2월 이후 2년 만이다. 하지만 8월 현재 지금껏 7개월째 13차례 만났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합의안은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보건의료정책(의사 증원)의 가장 강력한 거부권자로서 의협의 위상은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한 셈이다.
복지부는 뒤늦게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를 열어 의사증원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하는 모양새를 갖췄으나 달라진 것은 없다. 지난 8월 중순 보정심 첫 회의에서 복지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를 통해 우리나라 임상의사 수가 인구 1천명당 2.6명(한의사 포함)으로, 오이시디 국가 평균(3.7명)보다 한참 낮은 최하위권이라고 밝혔다. 의협은 물론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의협은 최근 간호법 무산 과정에서도 ‘슈퍼 갑’으로서 존재감과 영향력을 과시했다. 간호법은 우여곡절 끝에 올 4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제정이 무산됐다. 대통령의 결정은 형식상 복지부의 재의 요청에 따른 것이지만 의사들이 중심이 된 보건의료단체들의 집단행동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08년 한국의사연구회를 모태로 한 의협이 이렇듯 정부 보건의료정책의 거부권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1999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5월 대한의학협회에서 대한의사협회로 명칭을 바꾼 당시만 해도 의협은 전문가 단체로서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의약분업을 시행하자 이에 맞서 집단휴진 등 단체행동에 나서면서 의협은 존재감을 키웠다. 1999년 11월3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집회에 2만명이 운집했고, 이듬해 2000년 2월에는 4만명이 서울 여의도에 모였다. 의협은 2014년 원격의료 파동 때 두번째 집단휴진에 나섰다. 정부가 정보통신기술(ICT)을 이용해 의사와 의사, 의사와 환자 사이 비대면 방식 원격의료 정책을 추진하자, 의협은 ‘동네의원 다 죽인다’며 집단반발했다.
이 두번의 집단행동으로 의사들은 우리 사회 어떤 전문가집단보다 강한 이익집단으로서 영향력과 효능감을 체감했다. 자신들의 단체행동, 곧 집단휴진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다른 이익집단의 행동과는 그 파괴력이 원천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이익집단이란 “구성원들의 공통된 사적 이익을 위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단체”를 말한다. 이들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정책의제 설정부터 결정 및 입법 그리고 집행 및 평가에 이르기까지 정책과정의 모든 차원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책생태계의 시선에서 볼 때, 의협은 이익집단이 대한민국 정책결정 과정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행태를 보여줬다. 사실 보건의료정책과 결부된 이익집단은 여럿이다. 간호법 갈등에서 보듯 대한병원협회, 대한간호협회, 대한약사회 등 또 다른 굵직한 단체부터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대한임상병리사협회 등 숱한 직역단체들이 있다. 의협은 이 중에서도 갑 중의 갑, ‘슈퍼 갑 이익집단’이라고 할만하다.
오늘날 많은 정책이 그러하듯 보건의료정책도 “정부의 정책 입안이나 국회의 법률 제·개정 등 여러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의 다양하고 첨예한 이해관계 및 대결 구조에 의해 결정”(의협 의료정책연구소)된다. 우리나라에선 현행법상 로비활동이 금지돼 있어 이익집단의 양태가 미국 등 외국과 달리 나타나지만, 그 본질에선 다르지 않다.
문제는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통한 이익추구형 정책개입 행위다. 의협 의료정책연구소는 대표자의 국회 진출과 각종 정부 위원회 참여, 입법청원, 선거 시기의 정책 제안, 외부단체와의 연대 등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위한 활동에 나서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사회의 정책결정 과정은 본질에서 숱한 행위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가치를 투영하면서 격돌하는 대립과 갈등의 장이다. 때문에 이 과정이 어느 한 이익집단의 전유물이 돼서도, 어느 하나가 과잉대표돼서도 안 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균등하게 대표되고 다양한 가치가 민주적으로 수렴돼야 한다. 더불어 그 과정은 투명해야 한다. 의사들은 어떤가. 국가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은 만큼 높은 윤리의식과 공익성도 함께 요구돼야지 않을까.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와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의 혁신 없이는 좋은 복지국가도, 질 높은 민주주의도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 정책행위자를 탐구하는 이 연재칼럼 집필에 매진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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