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8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이영관 기자 2023. 8. 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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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이달 독회 추천작은 김보영 소설집 ‘종의 기원담’(아작)과 김솔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문학동네)입니다.

김보영 소설가
종의 기원담
소설가 김솔
말하지 않는 책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이태경 기자

◊김보영 ‘종의 기원담’

생명의 진화 과정에 대한 철학적 물음

과학은 ‘사이파이Syfy’(과학소설)에게 있어서 필요조건이라기보다는 충분조건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의 과학소설들은 과학적 지식과 환상적 요소들을 뒤섞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정향은 기본적으로 상극이다. 판타지가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향수에 기초해 있다면 과학소설은 미지에 대한 탐구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김보영의 소설, ‘종의 기원담’(아작, 2023.06)은 정통 사이파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인류세’를 넘어 먼 미래의 로봇이, 로봇의 시각으로, 로봇의 방식으로, 로봇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세상을 주도하는 ‘로봇세’를 다룸으로써 ‘인간’ 너머의 존재 양식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소설이 소개하는 기본 풍경은 로봇세는, 그 삶의 양상에 있어서, 인류세와 다르지 않다. 먼 미래의 로봇들은 오늘의 인류와 거의 똑같은 사유과 감정을 가지고 있고(가령, 이런 구절을 보라:

세실이 자상하게 물었다. 그 말소리가 너무나 평온하고 친근해서 전류가 막힐 것 같았다[p.165]) ,

이기적 본능과 인간 관계, 정치적 갈등들은 마치 오늘의 한국사회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심지어 로봇들은 종교에까지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광적으로 집착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로봇세의 존재 양식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인류세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인류와 로봇의 심각한 차이가 있긴 하다. 인간은 유기생명이고 로봇은 조립 생명이다.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 다양한 방식의 노출을 행한다. 반면 로봇은 기관부를 여는 게 일반적이다. 유기생명은 “그 어떤 규칙도 적용할 수 없는 구조”(p.157)라면 로봇은 규칙들의 집합 체계이다.

희한하게도 로봇들에게 저 규칙 부재의 인간적 생명성은 신비의 블랙홀이 된다. 일단 그것에 홀리면, 로봇은 기꺼이 인간을 “숭앙”하고 “경애”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향은 무자비에게 감염적이다. “로봇은 왜 창조론에 매혹되는가”라는 모두(冒頭)의 명제는 그렇게 해서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기저 관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유기생명학을 창시하고 그로부터 인간을 만드는 기제를 결정적으로 제공했던 주인공은 인간은 박멸하는 데 주력하고 대체로 성공한다. ‘생명의 살상은 합당한가’라는 최후의 의혹을 남겨놓은 채로.

왜 이러는가? 주인공 ‘케이’의 생각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인간 숭배는 로봇을 노예화한다는 것이다. 로봇의 자아가 망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까닭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케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확신은 인간은 “오염으로 뒤덮인 생물, 오염을 먹고 사는 생물. 오염을 필요로 하고, 오염을 퍼트리는 생물”이라서 결국 지구를 훼손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리고 그것이 ‘케이’의 인간 박멸 사업의 대의로 작용한다.

이 논리는 매우 불투명하고 작품 전체의 사건들의 맥락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 같다. 그것은 우선 정해(精解)가 가능한 알고리즘을 통해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하는 완벽한 개체에 대한 욕망의 위험성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작품 속의 로봇이 그런 개체를 열망한다면, 이 안의 로봇이 실제의 인간과 유사한 사유․정념을 구사한다는 점에 비추어져, 완벽한 개체에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로봇의 자아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추론을 거쳐 모든 생명의 자아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논법이 구축될 수 있다.

이런 추론은 로봇의 심성이 자가당착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귀띰한다. 왜냐하면 원래 자아를 지키려는 의지는 노예화에 대한 거부인데, 그런 정념의 최종적인 귀착지는 완벽한 개체(인간)에 대한 숭배, 즉 자기 노예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로봇이 매번 로봇적 삶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매순간, 가령

“유기생물학에서는 매순간 변화하는 개체를 한 개체로 인식하기 위한 방정식을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는 줄 압니다만, 애초에 접근 방향이 틀렸어요. 유기생물은 변화하는 파동의 연결성과 관계성 어딘가에 잠시 머무는 환상입니다.”(p.303)

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숨은 힘으로 작용한다. 이 감추어진 논리는 이 작품을 인간과 로봇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의 진화적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 속으로 몰아 넣는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이 철학적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세를 지탱해 온 ‘사회진화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성찰에 속한다. 인류를 지적 생명으로 진화시키고 지구의 지배자이자 우주의 정복자로까지 발전시켜 온 그 논리는 또한 지구와 생명세계의 근본적인 절멸을 초래한 주범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미래가 진정 지속가능한 생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저 유명한 명제와 “아는 선의 종족이고 비아는 악의 가능성을 함유한다”는 사회진화론의 기본 설정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서 궁극적으로 인류세 너머의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절박하게 요청한다. 그런데 어떻게? 작가는 후기에서 그 점을 ‘상생’이라는 용어로 적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직 논리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사유의 부재는 이 작품이 안고 있는 약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로봇류가 지배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로봇의 분류학은 있으나 로봇의 진화학이 없다. 무기생명의 등장(10만년 전)에 대한 설명은 있으나, 즉 어떻게 로봇이 지구의 지배자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가 없다. 또한 인간의 멸종사도 그 조건만 제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과정이 망각의 늪에 빠져 있다.(지구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면 인간이 그대로 멸종한다는 전개는 자연스러운가?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보다는 훨씬 고등한 사연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유기생물과 무기생명 간의 격렬한 투쟁의 기간이 가정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로봇의 인간 신앙이 제시되어 있을 뿐, 작품 내적으로는 그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앞에서 보았듯, 이는 로봇-인간의 상호 참조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으로 의혹을 제기할 만한 부분들도 상당수 있다. 가령 고도로 진화한 종으로서의 로봇류의 삶이라면, 그 종의 기계적 존재 양식도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타당할 듯하나, 작품 속의 로봇은 마치 산업혁명 시대의 고철들처럼, 혹은 지구가 멸망한 이후 관리체제가 무너진 세계의 ‘만달로리안’들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 묘사는 적절한 것인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작가가 실제 정밀한 과학적 지식을 작품에 원용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수록, 이 로봇 형태 현상학은 잘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이 소설을 어떤 ‘문제적 로봇’의 인간 사랑의 광태로 읽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렇게 읽는 게 독서의 박진감을 만끽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경우에도 ‘왜?’라는 질문은 여전히 독자를 괴롭힌다. 왜 로봇은 인간을 숭앙해야 하나? 먼 미래의 과학이 생명의 ‘유기적 형식’에 그렇게 특별한 의의를 부여할 근거는 있는가? 혹은 조립 생명은 유기 생명과 그렇게 배치되는 것일까? 물리와 화학, 그리고 생물학이 하나로 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대 과학의 추세에 비추면, 이런 발상은 반 걸음 뒤쳐진 과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

◊김솔 ‘말하지 않는 책’

자아실현과 인정투쟁 사이에 끼인 인간들의 요지경

김솔은 정보를 가득 담은 광주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작가이다. 간단히 말해 잡학의 달인이다. 이 점은 소설가의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정보 현시에 대한 충동이 자칫 구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소설의 요소가 아닐 수 없다)에 대한 배려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작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문학동네, 2023.06)은 자신의 생래적 충동을 잘 제어함으로써 단단한 단편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어서, 반가운 약진이라 할만하다. 물론 갈증 가득한 잡식에 의지하여 있을 법하지 않은 엉뚱한 이야기들을 넝쿨로 엮어 독자들의 눈을 현란하게 설레발이 치는 습관은 여전히 기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소설들은 일정한 건축의 비계를 세워, 그의 언어적 발광(發光)에 인생의 체험적 두께를 입히면서, 작가의 고민이 대중의 충동을 타고 표류하는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그게 설사 표류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독특한 인류학적 사유의 내장에서 익힌 묵직한 지적 양분이 발효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Little Boy’에서 감옥에 갇힌 Q가 ‘나’에게 “탁구공 스무 개”를 넣어달라고 요청한 대목에서 ‘탁구공 스무 개’는 어떤 비유나 암시가 아니다. 그건 그냥 그대로 ‘넌센스’이고, 이런 넌센스는, ‘오즈의 마법사’의 토네이도 마냥, 작가가 조작해내는 별의별 황당무계한 사건들과 말들을 우당탕 휘몰아간다.

그런데 이 넌센스가 그 형상 그대로 작품의 의미의 통로를 구성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의 엉킴 자체가 엉망으로 망가진 인간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유의하고 보면 이 뒤죽박죽 사건들은 마냥 의미가 붕괴된 언어의 잔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작품은 ‘무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들의 소망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꽤 일반적인 형태의 이 소망에 모종의 구별을 가함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도출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세계의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가장 빈번히 발화된 인간의 소망은 바로 ‘자아 실현’으로 요약될 수 있는 갖가지 ‘성취’의 목록들로 표현된다. 그건 현대인의 ‘존재의 이유’ 그 자체이다. 그런데 김솔의 소설은, 자아 실현의 욕구 아래에서 복류하는 또 하나의 욕망, 즉 인정 투쟁을 분리해내면서, 자기 실현의 탐욕적 추구와 사활을 건 인정 투쟁 사이의 얄궂은 운명적 종속 관계를 드러낸다.

방금 ‘자아 실현’은 현대인의 ‘존재의 이유’ 그 자체라고 했으나 작가에 의하면 실상 그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성인’과 ‘악마’의 차지이다. 반면 인간들은 ‘인정 투쟁’의 늪 속에 빠져 있을 뿐이고, 그것을 ‘자아 실현’으로 착각하게 되면 파멸의 철퇴를 맞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세상사람들의 판단을 끊임없이 좌고우면하면서 허덕허덕 이행하는 인정 투쟁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걸 그렇게 순수하게 제 몫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그대로 자아실현의 양태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김솔적 사건들의 붕괴와 파탄과 엉뚱한 튐들은 바로 이 두 욕망의 운명적 예속관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서로를 거울처럼 반영할 뿐,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다. 문제는 거울이 아니라 ‘문’인 것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 만이 길일지라도”(서정주, ‘사소단장’)... 옛 시인의 하소연이 아득히 멀어진다. 그걸 다시 메아리로 끌어당길 것은 작가인가? 독자인가? 작가에 의하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 역시, 그 운명 속에 사로잡혀 있는데.

후보작 선정의 배경

이번에 후보작으로 선정된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을 두고 이를 신작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세 편의 단편들을 연작으로 묶어 놓은 이 책에서 두 편은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이 보태짐으로써 이 소설이 장편의 모습을 갖추며 완성되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동의를 모았다. 그 이전까지 작가가 발표한 ‘종의 기원’들은 연속된 단편들일 뿐이었다면, ‘종의기원담’은 연작 장편인 것이다.

덧붙여 후보작에는 올리지 못했지만, 신진 류시은의 ‘나의 최애에게’(은행나무, 2023.06)가 주목을 끌었음을 밝힌다. 즉물적 사실주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그의 소설들은 시시각각의 사태와 인물들의 시시각각의 박동을 빈틈없이 일치시키고 있다. 이 사실주의에는 현실은 없고 사건만이 있다. 이성이 통제하지 않는 감각들만이 있다. 이 사실들의 즉물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세목들의 꼼꼼한 묘사이다. 그래서 이 사물 자체의 세계는 낯설음이나 생경함을 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진다. 이 꼼곰함은 아주 중요한 글쓰기의 덕목이다. 다만 즉물성은 오직 순간들에 대한 집요한 집착에 머물 수 있다. 언젠가는 이 즉자적 구체성 위에 대자-대타적 의미 충동을 집어 넣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가령 인물들의 단편적 사실들을 치밀하게 묘사했던 에밀 졸라는 그 사실들을 사회적 가계도로 엮음으로써 19세기 후반기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거대한 풍경화를 그려낼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혹은 정명환 교수의 ‘졸라와 자연주의’(민음사, 1982)가 밝힌 대로, 사실들 뒤에 숨은 불가해한 마음의 범인류적 동굴을 졸라는 파헤쳤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작가도 지금의 세계 너머로 가보길 권한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김지호 기자

◊김솔 ‘말하지 않는 책’

표제작 ‘말하지 않는 책’은 마르타 수녀라는 인물을 이렇게 소개한다.

“어느 누구도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았건만 ‘마태복음’을 술술 읽어 내려가던 세 살짜리 딸의 모습을 그녀의 부모는 똑똑히 기억했다.” 12쪽.

기억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부모는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절로 라틴어까지 깨우친 그녀의 밤낮 없는 호기심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까지 미치게 되자 그녀의 부모는 밤의 양초가 빨리 꺼지기를 바라고 초경이 빨리 찾아오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찾는 수도원의 서고가 모두 불 타 없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랬던 그녀에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그녀가 문맹이 되었다.” 12쪽.

혹독한 희귀 질병이라도 앓아 갑자기 듣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는 언어 장애를 갖게 되었다면 모를까,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문맹이 되었다는 소설의 설명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녀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스스로 문맹이 됐다.” 20쪽.

게다가 문맹이 되었다는 그녀가 책을 썼다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 발 더 나아간다. 그 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의 이미지화가 문자고 책은 문자로 된 기록일 텐데 책이 말을 안 한다니.

이쯤 되면 마르타 수녀와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설 안의 사태보다는 김솔이라는 작가가 이런 얘기를 소설로 써서 발표한 사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의도적 문맹상태에 이른 언어 천재 독서광이 지었다는 말하지 않는 책.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김솔의 소설에서는 너무도 쉽게,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이 일어난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말이 되게 쓴 것이 김솔의 소설이라는 말이다(벌써 말 안 됨과 말 됨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되니까 말로 그리 말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말이라는 것이 워낙 그런 것 아니냐며.

그러고 보면 말로 안 될 것이 없다. 코끼리도 냉장고에 넣을 수 있지 않은가. 그것도 ‘너무나 쉽게, 아무렇지 않게’.

실제로 김솔은 자신의 소설에서 수없이 많은 코끼리를 진지하게 때로는 격앙되어 냉장고에 넣는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결코 진지하게 구경하지 않기를 바란다(자신의 이러한 사인이 독자에게 잘 먹히기를 바랄 것이다). 연희패 중 한 사람이 나와서 자, 잘 들으십시오, 라고 말한다. 냉장고 문을 엽니다. 코끼리를 넣습니다. 냉장고 문을 닫습니다. 사뭇 진지하게 말해야 연희판의 분위기가 살게 마련이다. 이때 듣는 관중마저 진지해진다면 연희는 실패다. 김솔의 소설은 재밌게 읽혀야 한다.

“한 해 새로 등장한 작가들의 수가 그 해 발간된 책들보다 훨씬 많을 때도 있었다.” 65쪽.

“그들은 처음엔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무도인답게 질서를 지키면서 행진했다. 하지만 그들을 막아선 경찰들이 곤봉을 흔들어대며 위협하자 흥분하고 말았다. 그들은 걷지 않고 날아서 행진을 계속했고 경찰 쪽에서 부상자가 많이 나왔다.” 147쪽.

“1996. 2. 26. 영어 공용화 법안이 압도적인 찬성표로 국회를 통과하자 다음 날 아침 대통령은 새로운 법안을 공표했다.” 147쪽.

비유도 공상의 미래도 아닌, 코끼리 문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와 같은 말들로 가득하니 김솔의 소설을 어찌 재밌게 웃으며 읽지 않을 수 있을까.

창조주가 말로써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듯이(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장 3절) 소설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말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단단한 현대적 담론이 있는 바, 이를 활달하다 못해 소용돌이치는 김솔의 문장으로 번역하자면 ‘말로 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가 될 수 있다.

김솔은 언어에 내재된 초월적 관련성으로서의 의미보다는 기표의 물질적 차이성에 주목하는 듯하다. 손으로 그리거나 만지며 변경과 조작(造作/操作)이 가능한 물질로서의 언어. 그렇게 탄생하고 컨트롤되는 물질이면서도 소멸할 때는 웬일로, 애당초 없던 곳으로 돌아가듯 질량 보전 법칙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라지는.

김솔은 이 소멸 실험을 아주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자신이 한 말을 남들이 믿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말을 갖고 놀다가 그것을 희롱하다가 조롱하기도 하며.

열심히 한 만큼 소설 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남는 건 점점 없어져서 종국에는 마르타 수녀의 괴이쩍은 책처럼 그의 책도 ‘말하지 않는 책’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작가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스스로 문맹이 되려는데 그게 어째서 이토록 통쾌하게 읽히는지.*

◇이승우·소설가

이승우 소설가 / 오종찬 기자

◊김솔 ‘말하지 않는 책’

‘말하지 않는 책’이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쓸 수 없는 소설을 김솔은 쓴다. 보이는 세계(현실)가 전부라고, 혹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른바 리얼리즘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좁고 편협하고 초라한지 김솔의 소설을 읽으면 깨닫게 된다. 그 세계는 엄청나게 크고 복잡하고 난해하다. 기억과 예감, 꿈, 의혹, 모순, 그리고 신비가 그 세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쓸 때 아마도 염두에 두었을 서술을 나는 이 작가의 어떤 소설에서 발견한다. 예컨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사슬, 사건의 표면 안, 혹은 뒤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 음모론자들의 의중에 있을법한 의혹과 합리론으로 파악할 수 없는 마술적 세계를 현실 앞에 노골적으로, 보란 듯이 내세우기. 특히 ‘우는 책’의 설화적, 환상적 서사의 압도적 장황함은 이른바 ‘마술적’인 것의 힘을 엿보게 한다.

그는 ‘결과와 원인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고 ‘확정된 하나의 결과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을 동시에 동원해야만 그 원인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믿는 것 같다. ‘주객은 곤죽처럼 뭉쳐 있고 시공간은 끊임없이 교환하며 인과는 짝을 이루어 전개되지 않는다.’(낙타의 세계)고 믿는다. 믿는 것 같다. 이렇듯 모순된 세계를 담아내야 하는 그의 문장이 감각적이지도 감상적이지도, 그렇다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것은 불가피한 듯하다. 그는 정확하게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문장이 붙잡지 못한,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쓰려고 한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 책. 설화나 우화, 그리고 잠언이 이 모순된 진실의 세계를 서술하기에 그나마 쓰임새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으리라.

‘말하지 않는 책’이 말하는 것은, 책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말하지 않은 책’)라고 그는 말한다. 책이 위험한 것은 읽는 순간 독자와 화자와 인물과 작가의 운명을 바꾸기 때문이고(’말하지 않은 책’), 적국의 한복판에 던지는 폭탄이기 때문이고(’Little Boy’), 눈물 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는 책’) 책은 사람의 은유. 마르타 수녀는 위험해지지 않으려고 애써서 문맹이 되지만, 그렇다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글을 쓰지 않아도 위험하다. 그녀가 곧 책이기 때문이다.

◇김인숙·소설가

김인숙 소설가/이명원 기자

◊김보영 ‘종의 기원담’

20년이 넘게 걸려 3부작으로 완성된 이 소설의 종결부를 발표하면서 작가는 마지막 3부가 ‘상생의 길’에 대한 모색이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3부의 제목이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상생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 즉 불가능한 것일까.

S.F. 소설 ‘종의 기원담’은 로봇이 지구의 지배 종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와는 다르게 지성과 정서, 즉 자의식을 가진 로봇들이다. 거의 인간처럽 보이는 이 로봇의 종을 규정하는 특질, 혹은 조건은 아니러니하게도 그들이 비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설명을 통해 그들 자신의 존재 형식이 표현된다. ‘전선과 연결되어 있거나 외부 배터리를 달지 않았고 충전기를 꽂을 구멍도 배터리를 넣는 수납함 표시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인 인간. 이러한 인간들과는 다른, 달라도 너무 다른 로봇들이 인간을 발견하면서 펼쳐지는 충격과 공포 혹은 파괴와 투쟁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그러니까 로봇이라는 종이 인간이라는 종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 그러나 이러한 류의 먼미래 소설들에서 흔히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이 소설은 인류가 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펼치는 영웅서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로봇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종(로봇)이 진화한다는 신념에는 나도 변함이 없어.” “신앙 또한 로봇의 본성이야”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로봇은 멸절하고 말 것이다.” 로봇의 말로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묻는 질문은 존재의 방식이다. 로봇이냐 인간이냐가 아니라 ‘종’ 혹은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존재의 방식.

소설의 도입부인 세상 속에서 아직 인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 로봇은 지배 종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종이다. 로봇은 자신들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다. 신이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하고, 무결한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필요하다. 로봇의 세상은 그러한 세상이다. 그때 발견하게 되는 인간은, 그들과 너무 달라서,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압도적으로까지 여겨진다. 로봇은 ‘이 아름다운 생물’ 을 향한 ‘폭풍 같은 애정의 광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이 절대적인 사랑은 그들 종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가. 결국 이 소설의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진화해와서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너무나 익숙한데 새삼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그 질문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질문을 제기하는 소설의 방식 때문이고 그것을 이야기로 품어내는 작가의 능숙함 때문일 것이다. 로봇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슬픔, 절망과 희망은 마땅하다고 믿었던 인간의 기본적인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뒤집어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아주 오래된 근원과 아주 먼 미래에 대한 질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이언스 픽션은 말 그대로 과학 소설. 과학적 근거와 타당성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이 다만 치밀한 논증으로만 성립되지는 않는 듯하다. 과학적 타당성이 소설적 개연성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소설의 설득력이 생긴다. 설득이란, 당연히 감동이다. 독자들은 이와 같은 소설을 통해 무엇을 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어서, 마치 종의 바깥에 존재하는 듯한, 그러면서 모든 종의 결함을 안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는….

‘그건 과거가 아니었다. 미래였다.’

인간을 발견한 소설 속 로봇의 말이다. 만일 소설 속 주인공이 인간이었다면 뭐라고 말을 했을까.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김연정 객원기자

◊김보영 ‘종의 기원담’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은 십여 년에 걸쳐서 씌어진 3편의 중편소설을 함께 묶은 연작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인간이 멸종한 10만년 후의 지구이다. 대멸종이나 핵전쟁이 있었던 것일까. 인간만 멸종된 것이 아니라, 동식물(유기생명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다양한 로봇들이 사회를 이루어서 살아가고 있다. 환경위기의 심각함에 대해 걱정도 하고, 최초의 로봇을 만든 생명의 기원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하고, 로봇들 사이에서 유행인 성형수술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하는 등 오늘날의 삶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일상이 10만년 후의 지구에서 로봇에 의해 펼쳐진다. 주인공 로봇 케이는 인간이 멸종한 세계에서 유기생명의 개념을 생각한 최초의 로봇이다. 케이의 졸업논문에 근거해서 유기생물학이 학문으로 자리를 잡고 유기생명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수립된다. 케이는 인간 복제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뒤에 연구소를 떠난다. 30년 후 연구소를 다시 방문한 케이는 인간 복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들은 자신들이 복제해낸 인간을 생명의 신성한 기원으로 숭배한다. 공장에서 죽은 로봇의 부품을 분해하고 재생하여 필요한 물질을 만드는 로봇과는 달리, 인간(유기생명)은 주변 환경에서 원소를 흡수하고 재조합해서 자신의 몸을 성장하게 만든다. 유기생명의 자기생성(autopoiesis)적인 성격이 로봇들을 매혹시킨 셈이다.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는 물과 산소가 요구되는데, 문제는 물과 산소가 로봇의 기계장치에 녹과 부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케이는 자신의 유기생물학과 인간복제가 로봇에게 치명적인 환경위기를 가져왔음을 깨닫고. 인간들을 죽이고 연구소를 망가뜨린다. 그 이후 환경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연구소를 방문한 케이는, 모두 죽여 없앴다고 여겨졌던 인간들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인간에게 폭력을 집중시킬 것인가. 로봇 케이와 인간 시아는,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살아남는 폭력 대신에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해 간다. 로봇과 인간의 생명이 가진 종(種)으로서의 차이를 서로 긍정하고 존중하는 공존의 윤리학이 그것이다. 종분화와 진화의 계통을 표시하는 생명계통수(생명의 나무)에 로봇과 인간이 함께 자리하는 최초의 장면을 위해, 작가는 종의 기원담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거칠게나마 ‘종의 기원담’의 내용을 요약해 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이 작품이 SF소설의 문학적 품격을 섬세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과 관련된 생명복제의 문제나, 기상이변으로 대변되는 환경문제를, 인간이 멸종해버린 10만년 후의 지구를 대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자기의식 수준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에 대해 인간은 어떠한 윤리적 감수성과 정체성의 원리를 갖추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시 보고 생각하게 해 준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상의 심사를 위해서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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