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김병준의 ‘여당 엄석대론’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소설 제목보다 그 주인공인 ‘엄석대’로 널리 알려졌다. 서울에서 전학 온 소설 속 화자는 엄석대란 급장이 휘두르는 폭력을 목도한다. 아이들은 그 폭력에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오히려 동조까지 했다. 박종원 감독이 책 제목으로 만든 영화에서는 반 이름을 ‘5학년 2반’이 아니라, ‘엄석대 반’으로 호칭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설과 영화는 과거 어느 조직에서든 있었을 법한 ‘엄석대’를 부각시켰다.
영화 속에선 다음해 6학년 담임(최민식)이 엄석대(홍경인)의 잘못을 낱낱이 드러내자, 엄석대는 사라져버린다. 4·19혁명을 앞둔 시기를 설정한 소설·영화 곳곳에 이승만 독재의 유령이 비친다.
그렇게 사라진 엄석대가 여당 정치판에 등장했다. 김병준 한국경제인협회 고문이 28일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서 “어떤 분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엄석대라고 했다는데 정치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면서 ‘윤심’을 따르니 대통령이 엄석대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준석 전 대표가 ‘윤심’을 두고 엄석대를 언급한 걸 꺼낸 것이다. 김 고문은 “엄석대는 독재자이고, 윤 대통령은 매를 들고 자유를 준 자유주의자 선생님”이라며 “대통령의 철학과 국정운영 기조에 혼연일체 일심동체가 돼야 (엄석대)논쟁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그날 만찬에서 국정을 비판하는 야당·언론에 대해 “이런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 윤 대통령 앞에서 의원들은 ‘윤석열’을 연호했다. 영화 속 교실에 걸려 있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살벌한 표어가 떠오른다. 정경유착 의혹의 핵심인물인 김 고문이 ‘국민통합’을 강연하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윤 대통령이 엄석대가 아니라 엄석대를 쫓아낸 6학년 선생님이라는 강변도 적절한 비유가 되지 못한다.
그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에게 엄석대의 잘못을 까발리도록 강요했고, 이들에게도 ‘비겁했던 값’이라며 매를 때렸다. 윤 대통령이 담임이고 의원들이 학생이라면, 직언 못하고 대통령 눈치만 보는 작금의 상황은 소설·영화보다도 더 못하다. ‘힘센 독재자’ 엄석대가 소환되는 여당의 3월 전대 판과 8월 연찬회가 다 씁쓸하다.
윤호우 논설위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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