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맨땅에 헤딩` 33년 무협 원팀맨… "주어진 일보다 만들어가는 게 좋아요"
대학졸업반때 대기업 취업 확정했지만 무협 입사에 올인
항상 원하는 부서에 미리 준비한 업무제안 '자발적 지원'
"글로벌 중추국가 힘은 무역… 0.00001%라도 기여하고파"
"회사내 경력 관리도 한 사람의 인생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제 부족함을 알고 공부하면서 뭔가를 갖춰가는 게 좋아 주로 '맨땅'에 헤딩하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조상현(56·사진) 한국무역협회(무협)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하루하루를 '라이브'가 아닌 '얼라이브'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삶에 능동적이다 보니 그에게 열정과 노력은 기본이다. 운명적으로 무역에 관심을 갖고, 무역의 힘을 믿게 됐다는 조 원장은 '빠른 길보다 바른 길'을 좌우명 삼아 무협에서만 33년째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
대학 4학년 때 무협 입사를 준비해 그해 겨울 합격했고, 무협에서 발행하는 일간무역 외신부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부산지부와 e-Biz사업본부 전자무역추진센터를 거쳐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미래무역연구실 연구위원, 무역아카데미 글로벌연수실장, 무역정책본부 신성장산업실장, 부회장 직속 스타트업지원실장, 혁신성장본부 스타트업글로벌지원실장, 국제무역통상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을 역임했다. 대부분 업무는 조 원장이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그는 원하는 부서가 있으면 미리 준비한 뒤 담당 본부장이나 인사팀을 찾아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업무를 해왔다. 무협 내에선 "조상현한테 맡기면 자갈밭을 구르면서 오두막이라도 하나 만들어낸다"는 말이 나온다. 신사업 등 부담스러운 일도 손들고 나서 성과를 내, 신뢰가 깊이 깔렸다는 방증이다.
29일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만난 조 원장은 무역과 무협을 향한 애정, 일에 대한 자부심 등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부산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3학년 겨울방학 때 LG전자 전신인 금성사에서 인턴을 한 게 무협에 입사 지원을 한 계기가 됐다고 운을 뗐다.
"깨끗한 공장에서 자동화된 시스템을 통해 냉장고가 만들어지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포장 단계에서 일본 도시바 로고가 붙는 것을 보고 애국심 같은 게 치솟더라고요. 우리 제품의 기술력은 훌륭한데 브랜드가 약해 대접을 못 받는다는 생각에 기업을 도울 수 있는 무역 관련 직장을 찾아보게 됐죠."
조 원장은 추천을 통해 대기업과 은행 취업이 확정된 상태에서도 무협 입사시험을 준비, 졸업을 앞두고 원하던 무협 직원이 됐다. 그는 "지금의 한국종합무역센터를 있게 한 남덕우 전 회장님으로부터 신입직원 발령장을 직접 받고 악수도 했다"며 "지나고 보니 영광스러운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일간무역 외신부 기자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뗀 조 원장은 "세상 돌아가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야 되니 좁은 성에 살다가 성문을 열고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며 "처음 맡은 업무가 국제 원자재 시황을 정리하는 거였다"고 전했다. 이어 "일을 하면서 글로벌 무역과 경제의 판도가 바뀌어나가는 걸 배울 수 있었다"며 "그때 글로벌 경제와 우리 기업들의 세계화 진전 과정을 현장에서 목도한 게 운명처럼 돌고 돌아 지금 하는 일로 연결이 됐다"고 설명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으로 무역사업본부가 해체되면서 조 원장은 8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일반 사무직으로 넘어왔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일반행정 업무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며 "바닥부터 배우고 싶어 회원 응대 창구 업무를 지원했다"고 했다.
"무역업계를 대변하는 기관인 동시에 회원 서비스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힘들 걸 알면서도 하겠다고 했죠. 매일 업체들과 소통하면서 업계 현황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지원하려면 호흡이 같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도 회원사와 직원들에게 '같은 호흡, 같은 맥박'을 강조하곤 합니다."
조 원장은 부산지부에서 일하는 동안 보다 전문성을 갖추고 싶어 한국해양대 물류시스템공학 석사, 부산대 대학원 무역학과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자무역 관련 박사 논문을 쓴 그는 서울로 올라와 전자무역추진센터에서 근무했다. 당시 서류 없는 전자무역의 결정판 '이네고(e-Nego) 시스템'을 구축한 게 조 원장에겐 큰 보람이다. 사업을 마무리한 뒤엔 무역 분야의 전자화가 가능하다는 인식 전환을 위해 부지런히 업체 담당자들을 만났다.
21년차엔 갑자기 전혀 실무 경험이 없는 연구원에 가서 보고서를 써보겠다며 동향분석실을 지원했다. 그는 "엑셀로 그래프를 그릴 줄도 몰랐는데 하나하나 배워나갔다"며 "3주쯤 지났을 때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처음으로 공급망 리스크에 대한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향분석실에 있는 동안 무역 1조달러 클럽에 가입해 무역의 날이 당초 11월 31일에서 12월 5일로 바뀌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무역 1조달러 최초 달성 현장을 목격하면서 세상을 보는 '뷰 포인트'이 다양해지고 프레임도 좀 더 넓어졌어요."
조 원장은 국가브랜드 가치와 문화를 무역에 접목, 국격을 높이는 방안도 강구했다. 외국인 대상 한국 제품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회원사 대표들을 만나 많이 들으면서 정교한 전략을 세웠다. 정보 전달뿐 아니라 시사점까지 끄집어내 보고서를 작성한 뒤 업계에 제안했다.무역아카데미와 스타트업지원실에서도 새로운 사업들을 추진했으며, 무역 여건이 좋지 않은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준비하고 있는 일들도 많다. 그는 "입사 후 지금까지 업무를 통해 한국 무역 발전의 0.00001%라도 기여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며 "정부가 말하는 글로벌 중추국가의 기반은 무역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인의 창조적인 혁신성으로 좋은 제품과 서비스, 콘텐츠를 만들어 전 세계인들에게 공급함으로써 삶의 질이 높여야 해요. 그러면 자연스레 '한국과 한국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쌓일 테고, 그게 진정한 국격이자 코리아 프리미엄이죠. 기업들이 앞장서 열심히 하고 있고, 무역 지원기관 직원의 한명으로서 저도 보조를 맞출 겁니다."
박은희기자 ehpark@dt.co.kr
사진=이슬기기자 9904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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