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 독립영웅 흉상 철거와 ‘캠프 데이비드 정신’

서의동 기자 2023. 8. 2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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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은 한국이 일본의 안보위기 때 지원해야 하는 근거를 만들어놨다. ‘3국 신속 협의 공약’에 따라 한국은 중·일 간 센카쿠열도, 러·일 간 쿠릴열도 갈등이 벌어질 경우 일본 편에 서야 한다. 그 역의 경우도 성립하는데 남북, 한·중 갈등에 자위대가 개입하는 것이다. 공약에는 ‘협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미국은 하위 파트너와의 합의문에 ‘의무’를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제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서 철거하기로 한 ‘국내적 사건’은 캠프 데이비드 합의 취지와 무관하지 않다. 한·일 군사동맹화로 나아가려면 일본 군사력이 한반도에 출몰하는 데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심리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일 갈등과 저항의 상징물을 치우고 일본에 협력한 인물들을 받드는 ‘환경정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바라는 이들이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에 포진한 외교 엘리트들이다.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정책의 중핵은 언제나 일본이었다.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냉전 초기 구상한 ‘거대한 초승달 지대’도 일본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포괄하는 그림이었다. 한국은 소련과의 대립이나 일본 경제의 부흥이라는 맥락에서만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 행정부는 한국 원조계획의 의회 통과를 위해 “남한을 원조하는 것은 일본을 원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폈다. 미국은 한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한·일 경제통합을 추진해 1949년 4월 일본의 석탄과 한국의 광물자원을 교환하는 무역협정을 체결시켰다. 일본이 한국 지배기간 저질렀던 악행,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반감은 미국이 동아시아 질서를 설계하는 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출격 전진기지, 병사와 물자 수송의 중계기지, 수리·조달을 위한 보급기지이자 훈련·휴양을 위한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일본 중시’는 한국전쟁을 통해 확고해졌다. 일본의 요청에 따라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을 배제해 과거사 청산을 꼬이게 만들었다. 이런 경과를 보면 캠프 데이비드에서 틀이 잡힌 ‘한·미·일 동맹’은 이등변삼각형이 아니라 한국이 미·일 동맹에 끼어드는 찌그러진 도형이 될 것이다. 이 구조에서 한국 고유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여지는 많지 않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아무리 강해도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

냉전 형성기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은 냉전 해체, 중국의 세계질서 편입 등을 거치며 묻혔다가 미·중 패권경쟁을 맞아 부활했다. 미국의 힘이 약화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중국·러시아를 견제하려면 일본을 강화시키고 한·일을 동맹관계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 구상을 실현하는 데 윤석열 대통령은 안성맞춤의 조력자다. 그간 한국이 꺼려온 한·미·일 연합훈련이 윤석열 정부 들어 네 차례나 실시됐다. 강제동원 문제에 일본 기업을 면책하는 ‘제3자 변제’ 방안을 강행했고, ‘간도특설대’ 백선엽 장군의 친일 경력을 삭제했으며 도쿄전력 오염수 방류를 방치했다. 이렇게 해서 입장티켓을 얻어낸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윤석열은 미국의 ‘70년 숙원’을 들어줬다. 중대한 외교 전환에서 여론 설득 과정이 없었던 것쯤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와 관련해 국방부는 “공산당 입당 또는 그와 관련된 활동이 지적되고 있다”는 이유를 댔다. 그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맞지만 광복 2년 전인 1943년 사망해 북한 정권과 무관하다. 홍 장군이 자유시 사변에서 소련 편을 들었다는 주장도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일본군을 벌벌 떨게 했던 눈엣가시를 치우고 싶었던 것이 ‘본심’ 아닌가. 터무니없는 논리로 흉상을 철거하려는 국방부의 태도는 해방 정국에서 아무 혐의나 씌워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친일경찰을 방불케 한다.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는 교류·협력 심화를 거쳐 ‘남북연합’으로 나아가도록 돼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한일연합’을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국가 간의 관계는 ‘존엄·감정의 균형’이 이익 균형 못지않게 중요하다. 동아시아 국제정치는 감정이 작동하는 범위가 넓다. 일본에 대한 과도한 저자세는 국가 간 관계를 해친다. 꾹꾹 누른 용수철이 더 크게 튀어오르듯 ‘포스트 윤석열’의 한국은 반일 정체성이 더 짙어지고, 한·일관계는 도돌이표를 찍게 될지 모른다. 양국 모두에 불행한 일이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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