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예산 칼질 속 톱다운식 ‘전략기술 임무’ 설정한 정부
이론적 한계 뛰어넘는 세부 목표 설정
“남 따라하던 시절엔 먹혔을지 몰라도
새로운 것 만들어야 하는 데 유효할까”
정부가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전략기술을 확보하겠다”며 2차전지·반도체·모빌리티 분야의 발전 로드맵를 29일 제시했다. 이론적 한계를 뛰어넘는 고밀도 배터리, 저전력·고효율 인공지능(AI) 반도체, 완전자율주행 상용화 등 각 분야가 달성해야 할 세세한 ‘임무’를 톱다운(하향)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맨 연구개발(R&D)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차원이지만, 과학계 저변의 창의적인 역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전략기술 특별위원회(전략기술특위) 3차 회의를 열고 2차전지,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 모빌리티 등 3개 분야의 ‘국가전략기술 임무중심 전략로드맵’을 심의·의결했다고 29일 밝혔다.
지난해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집중 육성할 12개 전략기술 분야를 정했으며 올 초에는 육성 방안을 짤 민관 협의체 성격의 전략기술특위도 띄웠다. 특위에는 삼성전자·LG에너지솔루션·네이버 등 민간 출신도 포함했다.
이날 전략기술특위가 공개한 로드맵은 ‘국가 최상위 기술전략’이라는 게 과기정통부 설명이다. 오는 9월 ‘국가전략기술육성특별법’ 시행을 앞두고, 각 기술 영역 내에서도 가장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세부 분야를 골라내 우선순위를 부여한 것이다.
예컨대 2차전지의 경우 전략기술특위는 현재까지 이론적 한계 수준으로 여겨지는 에너지 밀도인 1㎏당 350와트시(Wh)를 넘어선 밀도를 구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니켈 함량 90% 이상의 하이니켈 양극재 등 핵심소재를 확보하겠다고 했다.
반도체는 AI 연산에 최적화된 ‘저전력·고효율화’를 달성한다는 목표다. 현재 와트당 2테라플롭스(TFLOPS·1테라플롭스는 1초에 1조번 연산)인 성능을 10TFLOPS까지 확대하겠다고 했다. 첨단모빌리티 분야에서는 2027년 완전자율주행 상용화를 위한 고성능 인공지능·컴퓨팅 기술 확보 등을 핵심 임무로 내걸었다.
윤석열 정부가 줄곧 강조해온 ‘임무지향적 연구개발’의 밑그림이 나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래는 달 탐사나 우주발사체 개발 등 국가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에 인력·자원을 집중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반도체·2차전지·양자 등 핵심 기술에 폭넓게 적용하겠다는 취지다. 권석민 과기정통부 과학기술정책국장은 “임무 달성의 핵심적인 기술을 식별하는 ‘탑다운(하향식)’ 접근법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앞서 과기정통부는 내년도 기초연구 예산 등은 대거 삭감한 대신, 국가전략기술 예산은 올해보다 6.3% 늘어난 5조원을 편성했다. 이번 로드맵은 “점령해야 할 고지를 설정한 것”이라는 게 과기정통부 설명이다.
전날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는 “이번 로드맵이 ‘어떤 연구를 하라’는 식으로 창의적 연구에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권 국장은 “연구 현장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룸(공간)은 열려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관료화된 R&D 예산 배분 시스템 속에서, 연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주제가 획일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문성모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장은 “기술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와중에 지금 정한 타겟(목표)이 1년 후에도 똑같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며 “남(선진국)이 했던 걸 따라하던 시절에는 목표지향적 연구가 먹혔을지 모르지만,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현 상황에서도 유효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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