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대학살’…佛농부들이 와인을 버리는 이유[조은아의 유로노믹스]

파리=조은아 특파원 2023. 8. 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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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보스타 지역의 한 와이너리에서 한 와인 생산자가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보스타=AP 뉴시스
프랑스에서 ‘보르도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단 소식이 들린다. 오랜만에 다시 테러가 터진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번 대학살은 ‘피’가 아니라 ‘와인’으로 흥건한 대학살이다. 프랑스의 자존심인 포도와 와인들이 혹독하게 수난을 당하고 있다.

유명 와인 산지인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에서 잘 자란 포도나무가 뽑히고, 깊이 숙성된 와인들이 폐기되고 있다. 포도 수확 시기인 8월 말을 맞아 풍성한 뉴스가 아닌 흉흉한 소식이 들리는 건 왜일까.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에 있는 한 포도밭에서 트랙터가 포도나무를 관리하고 있다. 나파밸리=AP 뉴시스

●수영장 100개에 채울 와인 버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프랑스가 와인 약 6600만 갤런을 폐기할 예정이라고 26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이는 올림픽 규격 수영장 100개 이상을 채울 수 있는 분량이다.

프랑스 농업부는 이렇게 와인을 버리는 데 보조금 2억 유로(약 2870억 원)를 지원할 것이라고 25일 발표했다. 초기 보조금으로만 1억6000만 유로(약 2294억 원)가 먼저 풀린다. 이 비용은 와인 생산 농가들이 와인을 버리고 포도밭을 철거하는 데도 쓰이지만, 판매하지 못한 와인을 향수나 손 소독제용 알코올 등으로 바꾸는 데도 지원된다.

프랑스의 자존심인 와인이 어쩌다 이렇게 홀대를 받게 됐을까. 생산 비용은 상승했는데 판매 가격은 그만큼 오르지 않아 농가들 손해가 크기 때문이다. 고물가로 에너지 가격, 유리병 등 자재 가격, 임금 등이 전방위적으로 올랐다. 프랑스 방송 BFM TV에 따르면 특히 유리병 가격은 지난해 40~60% 뛴 데 이어 올해도 20~40%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와인 가격은 그만큼 많이 오르지 못했다.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월간 와인 생산자 물가 지수는 올해 6월 110.9로 전년 동기(117.8)에 비해 약 6% 하락했다. 프랑스 남부의 와인 산지인 AOC 랑그독의 노동조합 기술 이사인 장 필립 그라니에 씨는 AFP통신에 “우리는 와인을 너무 많이 생산하는 반면 판매 가격은 원가보다 낮아 돈을 잃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와인 농가들은 와인 가격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프랑스 아페리티프 와인 연맹, 증류주 연맹, 와인 하우스 및 브랜드 연합 등은 최근 보도자료를 내고 “와인 가격을 낮출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남부 아비뇽 구시가지 골목길에 있는 ‘르 방 드봉 스와(Le vin devant Soi)’. 동아일보 DB

●佛 마트서 와인, 맥주에 첫 역전 전망

와인 가격이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워낙 주류 소비가 줄어든 데다 기후변화로 비교적 청량감이 더 강한 맥주가 선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현지 조사 결과 프랑스 슈퍼마켓에서 맥주 판매량이 올해 처음 와인을 앞지를 것으로 전망됐다. 현지 소비자 설문에선 이미 젊은층을 중심으로 맥주가 선호 주류 1위를 점하고 있다.

특히 와인 가운데서도 레드 와인 소비 감소가 두드러진다. 미디어 기업 RTL 조사에 따르면 레드 와인 소비량은 지난 10년간 18~35세 젊은층을 중심으로 32% 감소했다. 레드 와인은 화이트 또는 로제 와인에 비해 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와인 주요 수출국인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봉쇄 조치 등으로 수출에 차질이 생기면서 와인 매출에 타격이 생겼다.

최근 극심한 폭염 때문에 프랑스 등 유럽 지역 와인의 맛이 예전만 못한 점도 와인 판매 감소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CNN은 최근 ‘디켄터 세계 와인 대회’에선 최고상이 호주 와인에 돌아갔고, ‘베스트 인 쇼’ 라벨을 획득한 와인 50병 중 10병이 호주산이었음을 소개하며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 와인이 받은 평가와 대비하기도 했다.

로제 와인인 ‘생트 마르게리트 엉 프로방스’. 사진 출처 페르노리카 홈페이지

●“변하는 와인 맛 살리자”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프랑스 당국도 와인 맛 살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온도가 높아질수록 보르도 와인은 포도 성분이 변해 알코올 중독성과 씁쓸하고 떫은 맛을 내는 탄닌 비율이 너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가 지금처럼 극심해지면 우리가 알던 보르도 와인의 맛을 영영 잃을 수 있는 일이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당국은 결국 최근 보르도 와인 생산자들이 보르도 포도 외에 새로운 품종을 같이 곁들여 변한 와인의 맛을 조정할 수 있게 허용했다. 물론 당국의 엄격한 점검을 거쳐야 한다.

와인 농가들은 달라진 시대에 맞게 프리미엄 와인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전체적인 와인 소비는 줄었지만 프리미엄 와인은 여전히 반응이 좋기 때문이다.

더워진 여름 탓에 레드 와인에 비해 인기가 높아진 로제 와인의 경우 고급화가 두드러진다.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페르노리카 등 대기업들은 각각 ‘위스퍼링 앤젤’, ‘생트 마르게리트 엉 프로방스’란 프리미엄 로제 와인 브랜드를 일찍이 인수하거나 일부 투자해 판매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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