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혜가 순정을 갖기엔 세상이 너무 지독하다('순정복서')
[엔터미디어=정덕현] 스포츠가 좋은 건 각본이 없고 그래서 현실과는 달리 그 세계 안에서는 공정한 대결이 펼쳐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순진한 생각이라는 건 실제로 스포츠계에서 터져 나온 승부조작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KBS 월화드라마 <순정복서>의 타고난 천재 복서 이권숙(김소혜)과 그의 에이전트 김태영(이상엽)이 마주하고 있는 건 바로 그런 현실이다. 이들은 이기려고 링에 오르는 게 아니다. 져서 영원히 은퇴하기 위해 또 그 승부조작 경기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링에 오른다.
이권숙은 타고난 재능에 아버지 이철용(김형묵)의 지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국제대회를 휩쓴 천재 복서다. 하지만 한아름(채원빈)과의 시합을 앞두고 이권숙은 갑자기 잠적해버린다. 엄마가 사망한 후 그는 권투를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이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에 혹독하게 딸을 몰아붙인 아버지의 집착 때문에 이권숙은 권투가 죽을 만큼 싫어진다.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링을 떠나 도넛을 마음껏 먹고 연애도 하는 평범한 삶을 원한다.
김태영은 지독할 정도로 재능있는 선수들을 끌어들여 짧은 기간에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은퇴시키는 지독한 스포츠 에이전트다. 하지만 그에게 순정처럼 남아있는 고교시절 함께 야구를 했던 김희원(최재웅)이 아들의 눈 수술비를 위해 승부조작 경기를 하려다 끝내 포기함으로써 위기에 몰리게 되자 태영은 그 책임을 모두 자신이 떠안는다. 세 달 안에 25억을 변제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승부조작 경기를 가져와야 그도 또 김희원도 살 수 있다. 그의 선택은 잠적한 이권숙을 찾아내 승부조작 경기를 하는 것이다.
이권숙은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은퇴하기 위해 기꺼이 승부조작으로 지는 게임에 뛰어들려 하고, 김태영은 살기 위해 이 게임을 기획하고 주선한다.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스토리들이 대부분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를 그린다면, <순정복서>는 정반대로 살기 위해 지는 게임을 선택하는 이야기로 문을 연다.
이처럼 <순정복서>가 그리고 있는 스포츠계는 '순정'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하다. 그곳은 성적이 조금 떨어지면 가차 없이 퇴출되는 곳이고, 오로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걸 이루기 위해 아버지가 딸을 지옥 같은 링 모서리로 몰아넣는 비정한 세계다. 게다가 그 승부조차 공정하지 않다. 김오복(박지환) 같은 승부조작꾼이 개입해 때론 일부러 져야 연명할 수 있는 그런 세계다. '순정', 즉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다.
<순정복서>에 등장하는 스포츠인들은 저마다 경기장 안팎으로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권투가 지독하게 싫지만 은퇴하게 놔두지 않는 세상에 던져진 이권숙이 그렇고, 한때는 잘 나가는 특급투수였지만 지금은 퇴물취급 받으며 아들의 병원비를 위해 승부조작의 유혹에도 흔들리는 김희원이 그렇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이 이뤄주길 바라며 아버지가 아닌 코치의 길을 선택한 이철용이 그렇고 세계 챔피언이지만 낮은 개런티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야 하는 한아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정한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정복서>라는 제목을 붙인 데는 이 비정한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도전의 의미가 담겨 있을 테다. 승부조작을 하고 은퇴하려는 이권숙과 이 한 판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했던 독종 김태영이 어느 순간 스포츠의 승부 자체에 빠져들어 끝까지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그런 변신을 보여주지 않을까. 이권숙은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게 권투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착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복서가 지독한 세상과 맞서는 순정을 보여주지 않을까.
복서 출신인 헤밍웨이는 우리네 삶을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는 링에 비유하곤 했다. <순정복서>는 이 스포츠의 세계를 통해 이권숙 같은 청춘들이 마주하고 있는 '순정'을 갖기 어려운 비정한 세상을 꼬집는다. 그러면서 그 세상에 한 방 주먹을 날리려고 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을 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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